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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정화수

10. 정화수에 비친 달

by 허니베리


일을 마치고 친정집에 들렀다.

불을 켜자 두 분의 보금자리가 드러났다. 아버지는 안마 의자에, 어머니는 온열 소파에 앉으셔서 하루의 피로를 푸시며 도란도란 대화 나눌 시간이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집에 우두커니 서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이럴 시간이 없지.

정신을 차리고 엄마가 부탁한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휘어진 올림픽 대로 가로등 사이로 보름달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달을 보자, 절구질하는 토끼가 아닌,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을 위해 비는 여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온 세상이 잠든 새벽에 홀로 일어나 일원성신에게 손 모아 비는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절박했을 것이다. 이름 모를 옛 여인들과 연대감이 느껴졌다.


병원 주차장에 도착해서 부모님께 차례로 전화를 드렸으나, 두 분 모두 응답이 없었다. 나를 기다리고 계셨을 텐데......

트렁크를 열고 천천히 짐을 챙겼다.

직장 동료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던진 말이 머릿속에서 윙윙거렸다.

"어르신들은 치료 자체가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던데, 아버님 괜찮으세요?"


병원 로비로 들어가 의자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등록된 주 보호자가 아니고서는 병동으로 올라갈 수 없없다. 보안 담당 직원들이 수문장처럼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도착한 지 20분쯤 지났는데 부모님은 여전히 전화를 안 받으셨다. 머릿속이 안개가 끼는 듯 점점 뿌예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십여 분쯤 더 지났을 무렵, 병동에 방송이 쩌렁쩌렁 울렸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본관 5층....'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에게 위급상황이 닥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놀란 닭이 파닥대듯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하자, 병동 간호사실로 전화해 보라고 했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전화번호를 묻기 위해 안내 직원에게 다가던 중, 검은색 핸드폰 화면이 밝아지며 동그란 원 안에 아버지 사진이 떴다. 정화수에 비친 달 같았다.


“네 어머니도, 나도 깜빡 잠들었구나. 화장실 가느라고 일어났더니 전화가 와 있었네. 도착한 거니?”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달님이 내게 말을 건 듯 몽롱해졌다.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모시고 오셨다. 아직 잠에 취해 계신 듯한 엄마의 얼굴은 푸석푸석하고 거뭇거뭇했다. 간병하는 어머니보다 환자인 아버지가 오히려 더 생기 있어 보였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아버지께서 오른편 윗가슴에 삽입한 항암 장치를 마치 훈장 자랑하듯 보여주시며 설명하셨다.

"여기에 주사기를 꽂아 항암 약을 집어넣는 거란다. 해보니까 별거 아니네. 근데 앞자리 환자는 밤새 통증을 호소하더라."

“아프시진 않으셨고요?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겠네요. 상급 병실로 바꿔드릴까요?”

머릿속으로 빠르게 병실 간 차액을 계산하며 조심스레 여쭤봤다.

“아니야, 그 사람을 보니 내가 상대적으로 괜찮은 거구나, 위안이 돼.”

“짓궂으세요, 정말.”

으로는 타박하면서도, 어린아이같이 씩씩하고 해맑은 아버지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


“오늘 출장 갔다가 밖에서 고등어회 먹었는데 신선하고 맛있더라고요. 퇴원하시면 모시고 갈게요.”

“그래? 그건 내가 사마. 점심값 아껴서 모아놓은 게 있거든.”

외식을 약속하시는 아버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환자복 차림에 링거를 주렁주렁 매다셨지만, TV 뉴스에 등장하는 대기업 회장보다 당당하고 즐거워 보이셨다. 알뜰히 용돈 모아 가족과 오순도순 맛있는 음식 나누어 먹을 돈이면 충분했다. 자식들 앞에서 어깨를 펴고, 행복을 누리는 데 말이다.


아버지의 기운과 눈빛이 차가운 무채색 병원에 온기와 색깔을 입혔다.









이미지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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