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호흡 뒤 열리는 물살
아버지의 발병, 정확히 말하자면 첫 입원 이후 두 달 반이 지났다.
아버지의 몸무게는 7kg이, 나는 3kg이 줄었다.
살 이외에도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요즘 내 생활을 돌이켜 보았다.
아침에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아버지를 직장에 모셔다드리고, 출근한다. 화장실 가는 것도 참아가며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 후에는 식사 준비와 집안일을 한다. 아이를 돌보고, 부모님을 위해 장을 보고, 형제들에게 아버지 소식을 전한다.
수영장 물속에 머리까지 잠긴 채 살아가는 것 같은 나날이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넘실대는 물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명료치 않고, 내 움직임은 물 밖 사람들과 달리 둔하고 부자연스럽다.
어느 날은 목이 뻣뻣해서 잘 돌아가지 않고, 어떤 날은 손이 퉁퉁 부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왼쪽 얼굴 감각이 오른쪽과 다르다는 걸 인지했다. 아침과 저녁에 화장대에 앉아 얼굴을 두드릴 때마다 병원 진료를 받아야지 결심하고는 낮에는 까맣게 잊었다.
오늘은 잇몸이 부어 칫솔이 스치기만 해도 비명이 나올 정도였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결심했다.
'집에 도착하면 곧바로 소파로 가자. 그 위에서 아기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눈을 감고 쉬는 거야.'
홀로 누워 휴식을 취하는 상상만으로도 연인과의 데이트를 회상하는 것처럼 나른해졌다. 단 한 시간만이라도 고요함 속에서 머물 수 있다면 정신도, 몸도 회복될 것 같았다.
집 문을 열자 낯익은 신발 두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미안함 서린 목소리로 나를 맞이하셨다.
“집 앞에 공사를 해서 시끄럽고 답답해서 아까 낮에 아버지 모시고 왔어. 아이 얼굴도 볼 겸.”
“잘하셨어요. 공사가 언제까지죠? 공사 끝날 때까지 여기 와 계세요.”
순발력 있게 답했으나, 머리를 철사로 조인 듯한 통증이 스쳤다.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셨고, 어머니는 식탁 의자에 앉으셔서 내게 핸드폰에 새로 설치한 앱 사용법을 물으셨다.
아이가 태권도 도복을 펄럭이며 들어왔다. 아이와 인사를 나누신 부모님께서 서둘러 일어나셨다.
“식사하시고 가시지, 왜 벌써 일어나세요?”
“조금 전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속이 영 불편하구나. 옷도 갈아입어야 할 것 같고.” 아버지께서 초조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혹시라도 응급실 가야 하는 상황 생기면 바로 전화 주세요. 저번처럼 새벽까지 기다리지 마시고요.”
부모님을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화장실에 들어가니 상태가 엉망이었다. 흡, 하고 숨을 참았다.
물줄기를 세게 틀어 변기와 바닥을 씻어 내렸다. 수증기가 가득 차오르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릴 적 수영장에 빠져 아래로 가라앉던 장면이 떠올랐다. 작은 물방울들이 사방에 부딪히며 내게 튕기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청소 솔로 바닥을 벅벅 문지르다가 작년에 미국 시댁에서 화장실을 청소하던 때가 생각났다.
결혼 10년 만에 처음으로 시댁 방문을 앞두고, 시어머님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의식을 찾자마자 3일 만에 퇴원을 시켰고, 때마침 미국에 간 내가 한 달간 어머님을 보살펴야 했다. 떠나오기 전 음식도 넉넉히 만들어 놓았지만, 편찮으신 노인들만 남겨놓고 한국으로 돌아오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다시 한번 집을 둘러보니 이불과 화장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불을 전부 모아 세탁하고, 화장실 세 개를 놋그릇 닦듯 정성껏 닦았다. 그래도 못내 아쉬움이 남아 집에 돌아와서 낡은 이불을 대신할 새 이불 두 채를 보내드렸다.
천만다행으로 어머니는 회복되셨고, 그 이후에 방문한 아주버님 가족은 시부모님과 여행을 다녔다. 어머니께서 내가 선물한 이불을 아주버님네가 잘 덮고 잤다며, 몇 개월 만에 다시 방문하는 그들을 위해 이불을 더 보내줄 수 있냐고 물으셨다. 그때 느꼈다. 손의 수고로 부모를 돌보는 이가 있고, 사랑의 대상이 되어 부모를 기쁘게 하는 이가 있다는 것을.
누군가 말했다.
‘부모에게 잘하면 하늘에서 복을 내려준대.’
카톡 프로필 사진들이 떠올랐다.
자유의 여신상 앞에 선 형님의 반짝이는 눈빛, 골프채를 휘두르는 오빠의 근사한 자세, 우리 아이와 동갑이지만 사립학교 교복을 입어서인지 더 의젓해 보이는 동생 아들, 그리고 암 진단 후 부모님이 힘없이 앉아계신 2인용 그네를 밀어드리는 우리 아들의 사진.
먼 훗날, 신이 내게 위 사진 중 나에게 있고 싶은 자리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무엇을 고를까. 핸드폰을 열어 다시 한번 사진들을 살펴보고 눈을 감았다.
부모님을 위해 화장실을 청소하고, 부모님 곁에서 그네를 밀어드리는 장면을 고를 것이다.
복은 그렇게 손끝에 있었다.
일과를 마치고 나니 또다시 늦은 밤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때와 달리 마음까지 지치지는 않았다.
오늘의 나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부유물을 손에 잡고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수영 초보자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음--파- 음--파-
푸-----
호흡 뒤에 물살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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