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변경된 순위
한여름에 고장 나면 안 되는 게 몇 가지 있다. 그중에서도, 에어컨과 냉장고는 1, 2위를 다툴 만큼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하필 중복 무렵에 부모님 댁 냉장고가 고장 났다. 막상 닥치고 보니 이것은 단연코 1위에 두어야만 할 심각한 사건이었다. 냉장고 고장은 식재료의 낭비뿐 아니라, 긴 노동도 뒤따르기 때문이다.
냉동실 안 찧은 마늘. 어머니께서 최초로 문제를 발견한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마늘을 담아 네모반듯하게 각 잡아 얼려놓았던 지퍼백이 액체가 담긴 것처럼 변하며 물이 배어 나왔다.
냉동실 안에는 보리굴비, 장어, 고등어, 소고기 등 췌장암 환자를 위한 단백질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것들이 지구 온난화로 데워진 바다에서 건져낸 것처럼 흐물거렸다. 모두 다.
식구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전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아버지는 입맛이 없으시고 속이 쓰리셔서 식사를 잘 못 하심.'
잠시 망설이다가 문구를 추가했다.
'8년 전 사드린 냉장고 고장 남.'
마지막에 덧붙이려던 문장은 어미를 고민하다가 지워버렸다.
'이번이 세 번째 고장. 다음에 고장 나면 새로 교체...... '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대뜸 말했다.
"아버님이랑 상관없는 냉장고 이야기는 내리자."
"그게 왜 상관없어? 그동안 우리가 도맡아온 이런 일들을 형제들이 알고라도 있어야지."
아버지께서 발병하시고, 나는 엄마와 함께 자연스레 주 보호자가 되었다. 막막함에 털썩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서 형제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에게 손짓하자, 병원비를 나누어 내고, 식재료를 보냈다. 주저앉은 바닥에 의자가 놓인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 냉장고가 고장 나 동생이 채워 넣은 정성이 녹아버린 것이다.
해동된 식재료들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먹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께서는 보여드리는 음식마다 입을 굳게 다무시고 고개를 돌리시더니, ‘짜장면’을 톡 내뱉으셨다.
하는 수 없이 부모님을 모시고 중국집으로 향했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유니짜장면이 식탁 위에 차려졌다. 반지르르한 검은 짜장이 노르스름한 면 위에 먹음직스럽게 덮여있었다. 오랜만에 아버지의 얼굴이 음식 앞에서 환해졌다.
아버지께서 젓가락을 잡으셨다. 그때, 아버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젓가락은 짜장과 면을 섞지 못한 채, 음식 겉을 맴돌고 있었다.
젓가락을 힘없이 내려놓으셨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눈앞의 음식을 빼앗긴 아이 같았다. 아버지께서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추듯 붙잡고 주무르셨다. 하지만, 오른손을 감싸 잡은 왼손 역시 떨리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눈앞의 그릇에 시선을 숨긴 채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엄마가 슬그머니 아버지의 그릇을 엄마 쪽으로 당겨 짜장면을 비벼드렸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냉동실을 정리하느라 씨름하신 엄마도 짜장면을 잘 비비지 못하셨다.
"이리 주세요. 제가 할게요."
짜장면의 달짝지근하고 기름진 향이 퍼졌다. 아버지께 짜장면을 건네드리자, 반 그릇이나 드셨다.
아버지의 젓가락질을 지켜보다가, 실수로 짬뽕 속 작은 고추를 씹었다.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땀샘과 눈물샘이 열렸다. 다행이었다. 매운 고추를 씹어서.
차가운 물로 입 안 열기를 식히며 한여름 고장 나서는 안 되는 것들 목록을 다시 정리했다.
1. 건강
2. 입맛
3. 냉장고
4. 에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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