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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품위

16. 미소가 깨진 뒤

by 허니베리


한여름 볕 아래, 바퀴 달린 사각 장바구니를 끌고 언덕길을 올랐다. 도로가 파이거나 단차가 있는 곳에서 어김없이 바구니가 덜컹거렸다. 바닥의 강도와 짐의 무게가 고스란히 손목으로 전해졌다.


철퍼덕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잿빛 콘크리트 위에 성인용 디펜드가 뒹굴었다. 포장지 위에 은빛 머리 모델이 기저귀를 들고 환히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햇볕에 말린 새하얀 빨래 같았다. 디펜드를 주워 담고 끈적한 땀줄기가 흐르는 목덜미를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언덕 위에 있는 부모님 댁에 도착하자 현관 앞에 택배 상자가 놓여있었다. 환자를 위한 죽과 영양식이었다. 박스를 들여놓은 뒤, 엄마의 눈과 손이 닿지 않는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집이 청결한 고요로 덮였다. 다시 한번 집안 곳곳을 눈길로 정돈하고, 병원에서 필요한 짐을 챙겨 현관문을 나섰다.


병원으로 가는 길, 커피를 마시면서도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왔다. 강한 비트의 음악도 소용없었다. 아버지의 투병 이후로 잠도, 음식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인지 온종일 꿈결을 헤매는 듯했다. 출산 후 나를 짓누르던 그 짙고 무거운 피로가 다시 밀려왔다.


아버지가 계신 병실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탔다. 내 곁에 선 임산부의 배가 숨 쉴 때마다 크게 부풀어 올랐다. 살짝 옆으로 물러서 그녀에게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아버지의 모습과 나의 출산 장면이 어른거렸다. 뱃속의 태아도, 아버지도 어렴풋이 새어 나오는 빛을 의지하며 미지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 고통의 길을 통과하고 있다. 신과 가족, 의사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것도 감수하며.


그녀는 3층에서 내리고, 나는 15층에서 내렸다. 암병동이었다.

아버지는 일인실에 입원 중이셨다. 백혈구 수치가 올라갈 때까지 이곳에 머무셔야 한다고 했다.


"저 왔어요."

아버지는 입술만 달싹거리실 뿐, 목소리를 내실 힘도 없으셨다. 수혈을 앞둔 아버지의 얼굴은 투명할 만큼 창백했다. 눈꺼풀마저 다 닫지 못한 채 누워계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갑자기 손을 내미셨다. 반가움에서가 아닌, 일으켜 세워달라는 신호였다. 아버지 팔에 주렁주렁 달린 치료제와 영양제가 걸음을 방해했다.


응급실에서의 밤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초점 없는 눈빛, 흔들리던 다리. 바지춤을 올려드리며 쏟은 땀, 더럽혀진 옷가지를 처리하며 올라오던 구역질. 형제들에게 꾹꾹 눌러쓰고는 보내지 못한 메시지, 침상 밖으로 빠져나온 아버지의 하얀 발의 섬뜩함.


화장실에서 나오시는 아버지를 부축해 드리며 병실을 둘러보았다. 통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병실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창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중심으로 아파트와 상가가 반듯반듯하게 놓여있었다. 병실과는 다른 세상인 듯 평화를 품고 있었다.


얕고 긴 숨을 내쉬며 아버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 과정을 이겨내면 새순이 돋듯 살아날 수 있대요.’

아버지께서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쓰셨다. 남은 한 손으로 아버지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지난번 퇴원하시며, 네 덕에 체면을 지키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나는 진정한 품위는 겉모습이 아닌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오는 것임을 아버지께서 받아들이시길 간절히 바랐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기저귀를 꺼내 포장지를 쭉 찢었다. 모델의 미소가 깨졌다. 그러자, 기저귀가 드러났다. 전하는 손에도, 전달받는 손에도 수치감은 없었다. 손끝으로 전해진 건, 오직 '삶'의 가치였다.




이미지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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