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장소도, 복장도 상관없이
“항암 치료 중 열이 오르고 설사를 일곱 번 이상 하시면 응급실로 가야 한 대요. 여기에 이런 내용이 있네요.”
보라색 리본이 그려진 책을 부모님 앞으로 쓱 내밀었다. 췌장암 치료와 보호자의 역할에 관한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책을 사서 책장에 꽂아놓고, 책 표지에 쓰인 ‘췌장암’이라는 글자가 눈에 띌 때마다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책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책등을 뒤로 돌려놓았다. 책은 묵묵히 꽂혀있었지만, 녀석들의 존재감은 상당히 거북했다.
책을 산 지 2주가 지나서야 책을 집어 들었다. 더 이상 '췌장암'이라는 글자를 무시하거나 도망만 다닐 수는 없었다. 마음먹고 책과 마주하니 몇 시간 만에 정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책을 전달하기까지 또다시 2주의 시간이 걸렸다.
“다 읽기 힘드시면 표시해 놓은 중요한 부분이라도 읽어보세요. 응급실로 모시고 가야 하는 상황 잊지 마시고요.”
엄마는 살펴보겠다고 하시며 거실 테이블 위에 책을 툭 올려놓으셨다.
며칠 뒤 새벽 다섯 시, 전화가 울렸다. 실눈을 뜬 채 전화를 받자, 엄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양반 몸이 뜨끈뜨끈하고, 화장실을 계속 드나드시네.”
“언제부터요?”
“어젯밤부터.”
모자만 푹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어머니 부축을 받으시며 아버지께서 나오셨다. 비틀거리시는 걸음걸이가 위태로워 보였다. 머리카락이 빠져 머리가 휑하고, 옷은 더 커졌다.
후방경으로 차 뒷좌석에 앉으신 아버지를 살펴봤다.
어제 아침만 해도 아버지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어떻게 하룻밤 새 이렇게 상태가 나빠지실 수 있지?
잠을 떨쳐내기 위해 눈을 끔뻑거리며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주차장은 한산했다. 접수하고 대기실에서 한참 동안 기다리니, 투명한 문밖으로 출근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응급실에서 아버지를 호출했다.
응급실에는 보호자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바지에 실수하실 것을 우려하시며, 엄마가 아버지를 따라나서셨다. 성치 않은 다리를 절면서 응급실로 향하시는 엄마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엄마, 응급실에 로비랑 연결되는 통로가 있어요. 제가 거기에 있을 테니까, 힘드시면 언제든 나오세요. 필요한 것 있으시면 연락 주시고요.’
아랫배가 묵직했다. 스트레스 때문일까. 두어 달 동안 소식 없던 손님이 찾아왔다. 편의점에서 생리대를 고르던 중 아래 칸에 진열된 보라색 비닐 포장지가 눈에 들어왔다. 성인용 디펜드였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야 일반 병실에 자리가 났다.
종일 드시지도 못하신 아버지는 침상에 누운 채로 이동하셨다. 응급실 앞 복도에서 아버지를 잠시 스치듯 뵈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손과 달리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고, 베개 위에는 빠진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엄마가 교대 요청을 허락하셨다. 병실로 들어가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설마 했는데 아버지 침상 쪽에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며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채도를 달리하여 상하의를 맞추어 입고, 분위기에 어울리는 향수를 뿌리시던 분이라고 하면 누가 믿을까.
성인용 디펜드를 침상 곁에 슬며시 올려놓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눈을 감으셨다.
드라마 속 뻔뻔한 아주머니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저도 아이 낳고 사용했어요. 착용하시면 안심되실 거예요.”
아버지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쓰고 있는 과장된 위안이 아버지의 자존심을 흔드는 것은 아닐까 싶어 고개를 떨궜다.
그때, 간호사가 들어와 인슐린 주사를 놓았다. 주사기도 보라색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디펜드에 관해 슬쩍 여쭤봤다. 엄마는 한층 낮고 피로감 짙은 목소리로 아버지가 디펜드를 착용하셨다고 속삭이셨다.
‘췌장암 보호자’라는 책의 제목을 바라보는 것도 어려웠던 시간이 떠올렸다. 그땐, 그 책이 공포 소설보다도 더 두려웠다. 나는 ‘췌장암 보호자’라는 타이틀을 받아들이는 것도 이토록 버거워하며 주춤댔다. 하지만 아버지는?
당뇨병, 인슐린 주사, 암, 디펜드 같은 것들이 아버지에게 미사일처럼 떨어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치열하게 싸우고 계신다.
보랏빛으로 물들었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귀한 용사의 모습이다.
이미지 출처: freep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