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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실 세 친구

다이어트 음식들의 아우성

by 허니베리


퇴근 후,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서야 먹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냉장고 문을 닫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금 문을 열어보았다. 보관 용기 안에 있는 찬밥과 신 김치, 피클 정도가 눈에 들어왔으나, 반가움보다는 한숨만 나오는 걸로 봐서 허기가 심하지는 않았나 보다. 장 본 지가 언제였던지... 직장생활로 인한 피로가 누적되며 장을 볼 여력도, 요리할 힘도 없어서 배달 음식과 간편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요즘이다. 편의점 김밥이라도 사 먹어야 하나 생각하며 주방을 나서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쳇!


잘못 들었나? 가만히 서서 귀를 쫑긋 세워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멈칫했던 발걸음을 다시 떼었다.


“쳇! 너무하네, 너무해!”


흠칫 놀라 두리번거렸으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쿵덕쿵덕 왁자지껄 희미하긴 했으나,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곳을 향해 걷다 보니 다시금 냉장고 앞이었다. 냉장고는 조금 전 확인해 봤는데... 그렇다면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오는 곳은 냉동실 안? 심호흡한 뒤 냉동실 문을 잡아당겼다. 하나, 둘, 셋!


“에고 머니나!

“엄마!”

“이게 무슨 일이람!”

“살려주세요!”

“아야, 내 허리!”


냉동실 안 식재료들이 와장창 쏟아져 내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로 얼어붙어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중 비닐에 쌓인 길쭉한 녀석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가만히 서서 뭐 하는 거야? 바닥에 떨어지면서 엉덩방아 찧고 꼼짝도 못 하는 거 안 보여? 얼른 좀 일으켜 세워줘.”


앙칼진 외침에 나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손으로 그것을 집어 올렸다.


“나 좀 뒤집어서 확인 좀 해봐. 아무래도 허리가 부러진 것 같아.”


조심스레 그것(!)의 요청대로 뒤집어보았으나, 허리인지 어디인지 아무튼 부러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저기... 다행히... 부...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아요. 근데, 누구세요?”


“부러진 데 없다니 다행이군. 근데 뭐라고? 누구세요? 지금 누구세요라고 했어? 아, 나 참. 내가 누군지 물은 건가? 내 옷에 쓰인 글자 안 봤어? 거기 쓰여 있잖아.”


얼른 비닐 포장을 확인했다. 포장지에는 ‘맛없는 닭가슴살’이라는 이름과 함께, ‘22. 02. 27. 까지’라는 문구가 표기되어 있었다.


‘으윽... 맛없는 닭가슴살... 유통기한은 대체 몇 개월이나 지난 거야?’


“거기, 지금 뭐라고 지껄였어? 다시 말해봐.”


“앗, 저 혼자 생각만 한 건데 어떻게 들으셨나요?”


“자세한 거 알려고 들지 말고, 맛없는 닭가슴살이라니, 글자도 제대로 못 읽어? 똑바로 봐봐. ‘맛있는 닭가슴살’이라고 쓰여 있잖아. 당신,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거야!”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보니 정말 ‘맛있는 닭가슴살’이라고 쓰여 있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그나저나 유통기한이 한참 지났는데도 거기 계셨던 걸 보면 맛없는 분이 아니셨을까 싶은데...”


“당신 정말 혼나야겠군! 생각해 봐. 다이어트한다고 나와 내 친구들 잔뜩 사다가 냉동실에 가두어 놓고 몸에도 좋은 게 맛도 있네, 어쩌네 하며 얼마나 좋아했어. 그러다가 금세 질려서는 쳐다도 안 보고 이렇게 추운 곳에 방치해 놓고 말이야. 사람이 어째 그리...”


“흥, 내 신세보다 낫지, 뭐야.”


누군가 닭가슴살의 말을 가로챘다.


“닭가슴살 씨는 매끈하게 옷도 잘 갖춰 입고, 모양도 흐트러질 일이 없지만 내 꼴을 한 번 살펴보라고!”


지퍼백 속에 들어있는 초록색 가루가 절규하듯 외쳤다.


이건 또 뭔가... 지퍼백을 열고 만져보고, 냄새도 킁킁 맡아봤으나 정체를 밝혀내기 어려웠다.


“저, 죄송한데 뉘신지...”


“휴... 넣어놓은 당신도 모르겠죠? 그럴 만도 하지. 내가 바로 푸르고 우아하게 자태를 뽐내던 케일이라오. 어느 날 밭에서 뽑혀 이 집으로 들어온 뒤 당신은 나를 깨끗이 씻어줬지. 이때만 해도 행복했어요. 나도 드디어 생의 목적을 달성하는구나. 당신과 당신 가족의 영양소가 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런데 웬걸. 이렇게 추운 냉동실로 보내질 줄이야. 처음에 당신은 나를 냉동고 안에서 이리저리 옮기더니 결국 음식물들로 짓눌러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버리고 말았어. 나는 당신으로 인해 모든 걸 잃었어!”


“억울함으로 하자면 나만 할까.”


너... 넌 또 누구냐.


“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제과 학교 출신의 제과사가 만든 케이크라고! 그런데 지금 내 꼴을 봐. 짓이겨지고 짓눌러지고 심지어 너희들 냄새까지 잔뜩 배어 이제 회생 불능의 몸이 되고 말았어. 반짝반짝 빛나던 생크림 옷과 부드럽고 촉촉하던 시트가 어떻게 되었는지 좀 보라고! 초등학생이 마구 짓이겨진 찰흙 덩어리 같잖아. 사람으로 치자면 미스 유니버스였는데, 지금은, 지금은... 흑....”


“그만! 모두 그만!” 이번에는 내가 고함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음식(쓰레기)들을 다시 냉동실로 꾸역꾸역 쑤셔서 집어넣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항의하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나는 꿋꿋이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은 다이어트에 대한 결심으로 인한 것이었다. 다이어트를 위해 닭가슴살을 사고, 케일을 사고, 케이크는 먹지 않고... 하지만 다이어트는 성공하지도 못한 채 너무 많은 음식과 그들의 원성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들의 아우성을 뒤로하고 냉동실 문을 닫으며 결심했다. 다이어트에 대한 마음과 냉동실을 과감히 비워버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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