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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를 내려놓음을 포기한 것에 대한 포기

그런즉 맥주, 고기, 쌀밥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진데

by 허니베리




냉동실 세 동무와의 조우 이후로 다이어트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기로 결심한 뒤, 배달 음식의 향연 속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치킨을 뜯으며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알록달록한 도시락 사진이 눈에 띄었다. 사진을 클릭해 보니 채소를 활용하여 만든 다이어트 도시락! 예쁠 뿐만 아니라 먹음직스러워 보이기도 해서 맛있는 다이어트가 가능할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다이어트 포기에 대한 결의가 눈 녹듯 사라졌다.


인터넷 창을 닫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마트로 가서 오이당근사 왔다. 집에 돌아와서 장 봐온 물건을 펼쳐보고는 정신이 들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다이어트 포기를 결심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하지만, 장까지 봐왔으니 하는 수 없이 다이어트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요새 학교가 공사 중이라 식당 운영을 하지 않아서 동료들과 배달 음식을 사 먹고 있다. 다이어트 포기에 대한 결심을 깨는 것은 함께 식사하는 이들에 대한 배신행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련된 식문화 트렌드를 쫓고 싶은 마음이 결국 내적 갈등을 덮어버렸다.


냉장고 문을 열고 방울토마토며 양상추 등을 찾아보았는데 채소라고는 양파밖에 없다. 먼저 냉장고를 살펴보고 장 보러 다녀왔어야 했는데 말이다. 오이만 싸가야 하나. 오이와 당근은 같이 먹으면 영양소가 파괴된다는 이야기가 뒤늦게 생각나서 당근은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이도 시들시들한 게, 파격 세일을 한 이유가 있었다. 이대로 싸간다면 더 물러질 텐데... 나도 알록달록한 예쁜 채소 도시락을 싸서 SNS에도 올리고, 먹어도 보고 싶었는데, 상하기 직전의 오이로 뭘 어쩌라고. 그 순간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코리안 스타일 샐러드를 만들면 되잖아! 이름하여, ‘오이무침’.


고춧가루같이 매운 조미료가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라서, 고춧가루 통을 소지하고 다니다가 음식에 뿌려 먹는다는 일본인들에 관한 TV 방송 내용이 떠올랐다. 서양 샐러드에는 발사믹 식초 같은 걸 뿌려 먹지 않나. 식초는 지방을 분해한다고 한다. 다이어트를 위해 고춧가루와 식초(에 한국 샐러드에 필수적인 고추장, 마늘, 간장, 설탕, 레몬청, 참기름, 깨)를 넣어 오이를 무쳤다. 오이를 버무렸던 스테인리스 볼에 국물이 자작하게 남았다. 저 국물이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 우리의 소중한 수자원을 오염시키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대대로 물려줘야 할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오이무침 국물에 김이 솔솔 나는 갓 지은 흰밥을 크게 한 주걱턱 넣어 비빈 뒤 김 가루를 솔솔 뿌려 먹었다. 배는 불렀지만 고춧가루와 식초 덕에 내장지방이 분해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은 진짜 다이어트 도시락, '오이무침'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출근했다.


코리안 큐컴버 샐러드


점심시간, 나의 코리안 스타일 샐러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새콤달콤한 향이 확 풍겨져 나왔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어제 먹었던 쌀밥 생각에 군침이 돌았다. 때마침, 구석에 박혀있는 햇반의 절규가 들려오는 듯했다.


누군가 나를 찾아주길 간절히 기다려 왔어.
유통기간이 임박했거든.

햇반의 애끓는 사연 모른 척 저버릴 수 없어서, 들고 와 전자레인지에 돌린 뒤 오이무침을 척척 얹어 먹었다. 오이 속에 양념이 잘 스며들어 어제보다 더 맛있었다. 쌀밥을 먹는 게 다이어트와 거리가 있어 보이긴 했으나, 동료들과 시켜 먹던 배달 음식에 비한다면 이것은 분명 다이어트식에 가까웠다.


그래. 이왕 무너진 결심, 본격적으로 다이어트를 다시 시작해 보자!


나에게는 아직 오이 한 개가 남아있다.
다이어트 포기에 대한 유혹은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저녁 식사로 오이 한 개를 썰어놓고, 아이 반찬을 만들기 위해 쓱 하고 배송된 식재료를 정리했다. 돼지 뒷다리살이 가장 먼저 손에 잡혔다.


‘오늘 아이 반찬은 간장 제육볶음. 가만있어보자. 500g이라니, 아이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잖아. 많이 조리해 놓았다가 깜빡 잊고 오래되어 버린 적이 몇 번 있지.’


돼지고기 뒷다리살로 만든 제육볶음으로 다이어트를 한 남자에 관한 방송 내용이 떠올랐다. 그동안 먹는 것과 관련된 방송을 참 많이도 봤구나. 돼지 뒷다리살이 고단백이면서 비계가 적은 편이라, 이것만 먹다 보니 살이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아이에게 먹일 만큼 덜어내고, 다이어트 용으로 먹을 고기를 양념하기 시작했다. 어제부터 다이어트를 (결심)해서인지 변비가 온 것 같다. 다이어트를 하면 식이섬유가 많이 필요하다더니... 식이섬유 및 유산균 덩어리인 신 김치 한 포기를 꺼내 썰었다. 하지만, 다이어트 포기를 포기한 사람으로서 김치 국물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처럼 다이어트 음식 요리는 종합적 사고력을 필요로 한다. 머리를 많이 쓰면 칼로리 소모도 크다던데... 요리 과정조차도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요리라니!


완성된 김치제육볶음을 보니, 실로 다이어트를 위한 음식임에 틀림없었다. 다이어트 효과를 촉진하는 빨간색 양념, 식이섬유가 풍부하게 포함된 김치 사이로 자태를 드러내는 고단백 덩어리... 한 입 맛보았는데 짜다. 이상하다. 김치 국물도 넣지 않았는데. 요리를 너무 오랜만에 해서인지 감을 잃었나 보다. 아니면 아까 아이에게 줄 간장 제육을 하며 이쪽 양념에도 간장을 부었던지... 하는 수 없이 갓 지은 흰쌀밥을 퍼서 김치 제육과 비벼 맛을 봤다. 한 번 먹으면 멈출 수 없는, 한국인이 모두 아는 바로 그 맛이었다. 결국 두 그릇을 해치웠다.


식이섬유 가득 고단백 김치제육볶음




낮에도 다이어트 식을 해서 줄어든 위에 갑자기 밥 두 그릇을 밀어 넣으니 소화가 되지 않았다. 소화를 돕기 위해 효모가 많은 맥주를 한 캔 땄다. 맥주를 마시며 생각했다. 그런즉 맥주, 고기, 쌀밥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진데, 그중에 제일은 맥주라고.


분명 다이어트를 위해 요리하고 먹었는데, 다이어트 포기를 포기한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닌지 몹시 혼동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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