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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Apr 09. 2023

수련하는 인생

<오늘도 자람>, 이자람 에세이

"Be like a postage stamp - stick to one thing until you get there."


싸이월드 미니홈피 프로필에 이런 말을 써 붙여두던 시절이 있었다. 더 나은 내가 되어 원하는 미래를 살기 위한 다짐이었다.


자기계발서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자전적 에세이. 그런 책을 많이도 읽었다. 조기유학생, 세계여행가, 자식을 잘 키운 어머니, 예술가, 종교인, 장애인, 부자가 된 사람,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된 사람, 꿈을 이룬 사람, 그리고 동기부여 전문 강사들이 쓴 책을 못해도 50권은 읽지 않았을까? 그들의 인생에서 영감을 받고, 삶의 태도와 습관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열심히 밑줄을 긋고 다이어리에 옮겨 적었다. 막연히 꿈꾸던 그 멋진 구절들은 때가 되자 내 인생에 생생하게 뜻을 드러냈다.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던 시절에, 뜻대로 풀리지 않아 주저앉던 시절에. 마치 예언을 대하듯 아, 그 때 그 말이 바로 이런 의미였구나 실감했다. 성경구절도 아닌데, 말씀이 삶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책에 나온 깨달음은 나도 얻었는데, 책에 나온 성공과 성취는 나를 안 찾아왔다. 말씀은 결국 말씀으로만 남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을 컨텐츠로 쓴 책을 읽지 않는다. 이젠 그 모든 스토리가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 멈추어 뒤를 돌아보며 그 시점의 눈으로 해석한 결과라는 것을 안다. 앞뒤가 잘 짜인 그 스토리는 사후확증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의 인생과 성공에는 태도와 습관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도.


자전적 에세이는 더 이상 영감을 주지 않는다. 그러던 중 이게 마지막이겠지, 하고 여러 해 만에 찾아 읽은 자전에세이가 이자람의 <오늘도 자람>이다.


이자람은 정통 판소리를 공부한 국악인이고, 또한 현대극이나 현대소설을 판소리로 재창작해 공연하고 있다. 판소리는 제대로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우연히 이자람의 창작판소리 "노인과 바다" 일부를 유튜브에서 봤다가 확 끌렸다. 외국에 사는 나는 그녀의 공연을 현장에서 보기가 쉽지 않지만, 과연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책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너무나 오랫만에, 멋진 사람이 풀어놓는 자기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이 뛰었다.


매일의 연습은 겉에서 보기에는 서거나 앉아서 소리를 지르는 행위로만 보이겠지만 속에서 정말 많은 일이 벌어진다. 연습이란 목의 근육과 판소리 테크닉을 훈련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생각과 마음을 키우는 일이다. (p.28)


나는 수련하는 삶을 동경했다. 매일의 반복된 훈련을 통해 성장하는 인생 말이다. 어려운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 단조로운 일상을 반복할 때 가장 의미있고 행복했다. 그런데 30대 어느 중간에 방향이 사라져 버렸다. 더 이상 꿈도 야심도 인생의 목표도 없다.


그 삭막하고 폐허 같은 과정 속에서 내가 알고 치우는 더미들도 있었지만 이것까지 치워야 할 줄은 몰랐던 것들도 산더미였다. 결국 남김없이 다 게워내야 했다. 마지막까지 놓고 싶지 않았던 소중했던 것들도. 그렇게 '사천가'와 '억척가'는 내 삶을 천천히 떠나갔다. (p.88)


이자람님의 젊은 시절 걸작인 '사천가'와 '억척가'에 비할 수는 없지만, 나도 20대와 30대를 불태웠던 젊은 시절의 대표작이 있었다. 그런데 다 사그라들어 버렸다. 이것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나는 이제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축적해 가며 살아야 하나? 이자람님 같이 획득된 기술도, 남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잘 가꿔갈 수 있는 사명감도 없는데.


스물여덟. 그 당시 내 주변은 나를 포함해 대부분이 학생이었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 금액보다 시도 자체가 중요한 사람들이 많았다. (p.177)

  

이 대목에서 아, 이분은 예술가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본인의 성장기와 수련기에 대한 여러 대목이 한순간에 연결되었다. 이분은 나와 연배가 비슷한데, 내가 스물여덟일 때 내 주변의 대부분은 그동안 시도하던 이런저런 것들을 모두 정리하고 갈 길을 정하고 있었다. 내 앞에 있던 수많은 가능성의 문들이 빠른 속도로 닫혀간다는 걸 눈치채고 우리끼리 두려워하곤 했다.


나 되게 잘하는데. 잘하는 기술로 최선을 다해 깨끗하게 이야기를 들고 올라서는데. 이런 공연이 그리 흔치는 않을 텐데. 좀 오지. 와서 한번이라도 보지. (p.83)


네, 꼭 보고 싶습니다! 자전적 에세이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도 자람>은 남의 인생을 배우려는 마음이 아니라 감상하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자람님의 공연을 보고 싶고, 그런 공연을 있게 한 그분의 인생에 대해서 먼저 읽었다. 평생 연마한 기술이 있고, 그걸 총동원해서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래서 한 순간이라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기억 속에 남는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매일의 연습은 다르고, 그 다름이 축적되어 내가 된다. 매일의 연습은 결국 나의 소리를 좀더 낫게 만들고, 그 향상을 위해 연습하는 것이지만, 연습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바로 이것이다. 무대에서 내가 '쫄지 않게', 진땀 흘리지 않게 하는 것. (p.32)


안타깝게도 나는 더 이상 수련하는 인생을 살지 못한다. 지난 십여 년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하는 것만으로도 내 몫의 반복은 꽉 차버렸다. 꾸역꾸역 반복하다 지쳐버리는 일상이 앞으로도 십 년은 남은 터. 아이들 등하교와 점심도시락과 오후 라이드와 저녁식사, 각종 장보기와 가계부와 빨래와 청소 사이사이로 내가 더 이상 뭘 수련해서 어디에 가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매일의 일상은 다르고, 그 다름이 축적되어 내가 된다. 어쩌면 나의 수련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하루하루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잘 보낸 하루하루가 축적되어 내 인생이 된다. 방향을 정해서 어떤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하루하루를 쌓아가면서 사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수련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멋진 예술가를 통해 설렘을 느끼고, 그러면서도 평범하게 버티는 내 일상을 토닥이게 되는 매력있는 책이었다. 언젠가 한국에서 기회가 닿는다면 꼭! 이자람 님의 공연을 보고 싶다.

나의 이름은 한국 판소리 역사에 아주 중요하게 남을 것이니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한번이라도 내 작품을 직접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나 이자람 공연 봤어! 나 이자람 살아 있을 때 객석에서 같이 추임새 했어!" 하고 자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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