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보기와 그 속이 다른 사람은 수없이 많다.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매우 사랑스러운 사람도 그리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한 사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안 그래도 여린 심성을 지닌 그녀가 이 글을 직접 본다면 직설적 표현에 행여 서운하게 느낄까 조심스럽지만, 부디 너른 마음으로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쓴다.
처음 그녀에게 관심을 두었던 건 꽤 인상적이었던 옷차림 덕분이었다. 양어깨의 맨살이 훤히 드러나도록 디자인된, 섹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스타일의 상의, 주름이 많고 화려한 레이스로 뒤덮인 긴 검정 치마, 게다가 아찔하게 높은 굽을 가진 에나멜 재질의 구두까지 맞추어 입은 차림. 마치 백화점 영에이지 코너의 한 매장 앞에 놓인 이십 대를 겨냥한 마네킹 코디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이질감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장에서 만난 그녀는 오십 대. 외국인처럼 느껴질 정도로 큼지막한 이국적인 이목구비에 살집 있는 투박한 얼굴형. 막대처럼 가느다란 하체에 비해 다소 퉁퉁하다고 볼 수 있는 상체는 ‘결함’은 아니지만 ‘불균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에 가까웠으니까. 게다가 늘 무채색의 아무 특징이 없는 유니폼을 착용하고 있던 까닭에 나로서는 무언가 그녀가 ‘꾸민다.’는 행위와는 아주 완벽히 동떨어져 있으리라 생각해온 것이다.
편견에 사로잡힌 것을 부끄러워해야 정상일 진대 이렇게 글까지 써서 독자에게 고백하는 데에는 나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저 여자는 저렇게 예쁜데 왜 결혼을 못 하였느냐, 저 사람은 다 좋은데 종아리가 코끼리 다리 같은 것이 아쉽다, 분홍색 티셔츠는 돼지를 연상시키게 한다, 저 여자는 코가 굉장히 높던데 분명히 성형수술을 한 게 분명하지 않으냐, 그 옷은 어디에서 샀느냐, 그 구두는, 그 가방은….
몇 번 대화를 나누자마자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옷차림처럼이나 중년 여성에 걸맞지 않은 이런저런 유치한 이야기들을 떠듦으로써 나를 난감하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아무리 한참 어른이라 해도 내 신념에 맞지 않는 말을 다소곳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굳건한 성격의 소유자인 나로서는 심기가 불편하여 못마땅한 티를 내기도 했다. 몇 번인가 딱딱하게 신경질적으로 굴기도 하였다. “아우, 요즘 시대에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욕먹어요.” 그러면 그녀는 사춘기 청소년처럼 입을 삐쭉 내밀고는 큰 발소리를 울리며 사라지곤 했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자랑도 적당한 법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돈을 잘 벌어서 좋은 술을 얻어 마셨네, 잘 나가는 친구가 명품을 선물해줬네. 그 친구가 만나는 애인은 용돈을 턱턱 쥐여주네. 그녀 주변의 여러 남사친들도 자랑거리가 되었다. 키가 크고 옷을 잘 입는 남사친, 돈을 잘 쓰고 맛집을 많이 데리고 가는 남사친, 무슨무슨 공장의 대표 잘 나가는 남사친 등등. 대한민국의 보통 여자로 삼십 년을 살아온 나로서는 그들을 향한 유부녀인 그녀의 사심이 간혹 느껴져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으나 어차피 나와 관계도 직장에서 만난 동료 그 이상 이하도 아닐 뿐이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일부러 관심을 퍽 두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의 그 수많은 말들은 마치 부모에게 관심받기 위한 어린아이의 자랑처럼, 혹은 칭얼거림처럼 귀찮게 느껴지기도 하여 대꾸하지 않을 때도 종종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굴하지 않고 온갖 싱겁거나 세속적인 이야기들을 서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늘 그 속에 본인 이야기는 없었지만 남 얘기만 주야장천 늘어놓는 사람들이 흔치 않은 건 아니었으므로, 또 네이트 판의 별별 사람의 요지경 이야기 보는 게 낙인 나로서는 그저 일일 드라마를 보듯 넘길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그 진부한 문장을 증명하듯 나의 편견 속 중년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옷차림을 하고, 나의 편견 속 십 대, 이십 대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들을 내내 늘어놓는 그녀를 보면서 점차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와 종종 퇴근 후 고기도 함께 먹고, 가끔은 통화도 할 정도로 제법 가까워졌다.
얼마간 친해진 후로는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만큼 나이를 먹었을 때 품었던 생각들, 폭력적인 오빠, 개차반이라 말하기에도 아까운 남동생, 이기적인 여동생으로 이루어진 평범하면서도 복잡한 가정사와 결혼생활에 관한 이야기들. 이젠 개인적인 부탁도 아끼지 않았다. 친구 딸이 친구 얼굴을 포토샵으로 수정해주어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해두었는데 부럽더라며 자기 아들은 그런 걸 도통할 줄 모르니 좀 도와달라는 것이나 인터넷 검색, 쇼핑과 같은 사사로운 부탁에서부터 공인인증서 설치, 은행 업무와 같이 중요한 일들까지. 그런 부탁을 할 때면 어김없이 그 큰 입으로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군음식을 푸짐하게 사와 늘어놓는 탓에 나는 귀찮은 내색을 하면서도 그것들을 씹어 먹으며 무심히 들어주곤 했다.
한 날은 서류 작성을 도와달라며 두툼한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노후된 주택은 나라에서 도시재생사업의 명목으로 수리비용의 얼마간을 지원해준다는 것이었다.
“집은 뭐하러 이리 꾸며요. 저 초대해서 파티라도 하게요? 삼겹살만 좀 준비해주세요.”
서류와 함께 무뚝뚝하게 건넨 말에 그녀가 답했다.
“이렇게 하면 남편이랑 아들이 집에 자주 올까 싶어서.”
순간 휘몰아친 감정이 연민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 슬픔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매우 강한 감정이 온몸을 구석구석 훑고 간 덕에 오래도록 저릿했던 것만이 기억이 난다.
참 이상한 일이지. 남들에게 칭찬은커녕 트집만 잡아대고, 큰 목소리로 자랑을 하고, 늘 본인 위주의, 본인에게만 관심이 주어지길 원하는 모습만 보았는데, 그 순간 떠오르는 이미지는 텅 빈 집 침대 위에서 혼자 뒤척이고 잠 못 이루는 김은서 씨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녀가 그토록 화려하고 독특한 옷차림과 보이는 것에 탐닉했던 이유가 실은 애정을 갈구하는 것이었음을, 남들에 대한 그 수많은 사사로운 가십의 말들 속 외로움과 고단함의 출렁임을, 그 연약함을 나는 왜 진즉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집 예뻐지겠다. 은서님이랑 잘 어울리겠네요.” 나는 맹맹한 목소리로 겨우 한 마디를 내놨을 뿐이었다.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근무지를 옮기고, 한 권의 책을 출간하고 나서, 바쁘다는 핑계로 그녀와 연락이 서서히 뜸해지다 나는 그녀를 깜빡 잊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걸려온 전화. 그녀였다. 어김없이 남사친과 술 한잔하고 있다는 그녀는 용산의 한 대형서점에 가서 내 책 세 권을 구매해 남사친 두 명에게 선물하고 한 권은 집에 두었다고 했다. 왜 좋은 자리에 진열해놓지 않았냐며 직원에게 큰소리를 쳤다며 웃었다. 그러곤 곧 다이어트를 시작할 것이고 요샌 연주 씨처럼 예쁜 코로 변신하기 위해 병원 정보를 알아보고 있다는, 나의 성형 사실을 꼬집는 그녀 다운 말을 덧붙였다. 핸드폰 너머 그녀의 큰 목소리를 듣고 나는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뛰었다. 통화가 끝난 후 내 책의 한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며 페이지를 찍어 보내는 그녀에게 순간 전에 느꼈던 연민만큼이나 먹먹한 애정이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땅속 깊은 곳 용암이 꿈틀대다 마침내 솟구치듯.
왜 모르겠는가. 비록 애달픈 조각이 있을지언정 그녀는 그 자체로 정말 사랑스럽다는 것을. 짓궂지만 깜찍한 활력을 만들어내는 사람, 그 활달한 기운을 전염시키는 사람. 그래.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그녀는 아마도 이 표현을 더 좋아할 것 같다. 김은서 씨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예요.
그러니 이 글은 오십 대가 되어도 여전히 관심과 사랑을 꿈꾸는, 사랑스러운 한 여자의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스스로 본인 이름을 촌스럽다고 표현하고 불평해온 까닭에 그녀가 늘 개명을 꿈꾸었던 ‘은서’라는 이름을 썼다.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본명은 영원히 비밀에 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