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와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
어디선가 '열등감을 조장하는 사회'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서울법대를 졸업했음에도 오랜 기간 열등감에 시달렸다는 한 변호사의 고백이었다. 늦은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회사원 시절 "서울법대 나왔으면서 왜 사시를 안 봤냐"는 질문에 시달렸고, 변호사가 된 후에는 판검사 경력을 중요시하는 의뢰인들의 요구에 부딪혀야 했다.
그렇다면 졸업 후 바로 판검사가 된 사람들은 어떨까? 그는 그들 역시 열등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판사로 임관해도 서울중앙지방법원 같은 '중앙' 근무지를 제외하면, 어디서 근무했는지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녀 모두가 열등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0.1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 한국인이 모두 다 열등감을 느끼게끔 우리 사회가 설계되어 있다"면서 "재산 50억원 가진 사람은 100억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며 열등감 갖고, 100억 가진 사람은 300억, 1000억 가진 사람을 부러워"한다고 일갈한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조선시대의 과거 합격과 양반, 상민, 노비로 이어지는 공고한 위계질서"를 꼽았다.
그의 시선이 다소 주관적으로 과장된 면이 있지만, 한국인이 유독 비교와 열등감에 시달리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조선의 위계질서 영향이 아니다. 전근대시대의 공고한 위계질서는 조선만의 특징이 아니라 세계 어느 곳이든 그랬다.
다른 문화권에 비해 한국인이 여전히 비교에 민감하고, "넌 왜 다른 사람들처럼 그 시험 안 봤어?" "넌 왜 그런 별 볼 일 없는 근무지에서 일했어?" "넌 재산이 그거 밖에 없니?" 같은 질문에 열등감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개인 자체보다 집단과 배경 따위를 우선하는 사고방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집단 속에서 나의 위치와 가치를 확인하려는 경향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만든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해지니,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끊임없이 신경 쓰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인정과 평가에 따라 자부심과 좌절, 기쁨과 좌절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고, 또 그런 질문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며 살기 어렵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생각, 자신에 대한 감각이 다른 사람의 인정과 평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어느 TV프로그램에 출현한 원로배우가 그 나이까지 어떻게 그렇게 하루도 쉬는 날 없이 활동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대답했다. "칭찬 받는 게 좋아서 일을 놓지 못하는 것 같다고."
성시경의 ‘만날 텐데’에 출현한 김완선은 요즘처럼 뜨는 음악만 주목받는 세태 속에서도 음악 작업을 계속하는 의미를 어디에 두느냐는 질문에 말했다. "내 음악을 듣는 사람이 거의 없어도 일단 내 음악을 남기자, 그냥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이라고.
두 사람은 일의 의미가 정반대다. 한 사람은 타인에게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는 걸 동력으로 삼는 사람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다. 반면, 자신 안의 내적 기준을 등대 삼으면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기 정체성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사람은 "너는 왜 그 정도 밖에 안 돼?"라는 질문을 받아도, 스트레스 받을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시선을 던지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고 쉽게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집단주의적 사고방식과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의 차이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존 내쉬도, 서울법대를 나오고도 내내 열등감에 시달렸다는 변호사처럼, 자신의 탁월성과 우월성을 인정받음으로써 특별해지는 것에 집착한다. 뛰어난 사람만이 아니다. 나 역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주위와 비교하며 뒤쳐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그쳤다.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에이프릴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어떻게든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삶으로써 특별해지기를 추구하다가 끝내 비극적 결말에 이른다. 과연 특별함은 타인과 비교를 통한 탁월함이나 전혀 다른 삶의 방식 같은 외형적 차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걸까?
특별함에는 역사가 있다. 집단주의 사회였던 전근대의 특별함과 ‘개인’이 등장한 근대의 특별함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비교를 통해 우월과 열등을 구분해서 얻게 되는 특별함이 전근대의 것이었다면, 신분이란 옷을 벗겨낸 근대의 특별함은 내면이 발견에서 비롯된다.
이는 타인과의 비교를 멈추고 오직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며, 무엇에 가치를 두는지 깊이 탐색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다른 사람의 잣대가 아닌, 나만의 고유한 기준으로 삶을 채워 나가는 일이며, 바로 여기서 진짜 '특별함'이 탄생한다.
하지만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 안에는 외면하고 싶은 다양한 어두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 조심스레 그것들을 마주해, 비록 선하지만은 않고 또 부족하며 불완전하더라도 그런 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차츰 진정한 자신을 온전히 긍정하게 된다.
그것이 ‘개인’으로의 성장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자체가 특별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위대한 쇼맨」의 서커스 단원들처럼, 영화 「마스터」의 프랭크처럼 미약하고 부족하며 불완전해도 인간은 그저 나답기만 하면, 가장 빛난다는 사실을. 황가람이 ‘나는 반딧불’을 노래하듯, 빛나는 별인 줄 알았던 내가 실은 벌레에 지나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다는 사실을.
이 글은 <영화로운 개인> 1장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아 - 개인은 특별해야 하는 인간인가?’의 핵심 내용을 보완, 요약한 내용입니다. 네 편의 영화를 통해 시대에 따라 특별함의 성격이 변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영화의 인물들과 저의 이야기를 통해 부족하고 미약해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