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회에서, 말해야 통하는 ‘나’로 성장하기
1. ‘아니요’로 응답하는 인사말
집단주의 문화에서 자란 우리는 종종 ‘아니요’라는 말로 호의를 부정한다. 칭찬이나 선물에 ‘아니에요’부터 내뱉는 버릇 말이다. 이 단어에는 겸손과 예의가 담겨 있지만, 개인주의 문화권에선 말의 의미 그대로 거절로 읽힌다.
언젠가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한 배우가 MC에게 칭찬의 말을 건넸다. “아유, 아니에요.”라며 MC가 응답하자, 그 배우가 농담하듯 핀잔했다.
“아니, 내가 (본 네 모습이) 그렇다는데, 왜 (그걸)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내 생각이 그렇다는데!”
그 MC는 자주 어울리는 동료들의 칭찬에는 ‘맞아요, 그래요’라며 반쯤은 장난스러우면서 쿨하게 받아들이는데, 다른 직군의 동료에게는 지극히 한국인다운 손사래로 반응했다.
얼마 전, 며느리 책이 나왔다고 주변에 자랑하겠다며 시아버지가 몇 권 주문했다. 감사한 마음을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아, 아버님, 제가 나중에 드리면 되는데요. 안 사셔도 되는데…”
보통 그러면 상대방도 ‘아니다. 내가 사야지.’라는 식으로 나오는데, 아버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래? (내가 괜히 산건가?)”
순간 당황해서, 그제야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선물을 받을 때 세 번은 사양하고 받는 게 예의’라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예전에는 뭘 주고받을 때면 으레 몇 번의 사양과 권유가 오가느라 아웅다웅하는 ‘의례의 시간’이 있었다. 선물 받을 때는 이제 거의 그러지 않는데, 칭찬에는 지금도 여전히 그런 습관이 남아 있다.
2. 맥락으로 말하는 사회, 말로 소통하는 사회
칭찬이나 선물을 받을 때, 일단 ‘아니’라며 상대의 호의를 부정하는 식으로 속마음과 다른 인사치레는 집단주의 문화의 흔적이다. 인간을 그 자체보다 ‘관계 속 위치’로 이해하는 문화에서는 말보다 맥락이 중요하다. 그래서 말뜻보다 말이 나온 자리와 눈빛, 분위기 같은 비언어적 신호가 중요하다. 화자도 자신의 의도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청자도 상대방 말을 단어의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칭찬이나 선물에 ‘아니’라고 손사래 친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센스 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 반대로 말의 맥락을 지나치게 추측하다가 상대방을 곡해해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반면,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말의 표면적 의미가 중요하다. 인간을 관계의 일부가 아닌 독립된 주체로 보기 때문이다. 선물을 주었는데 상대가 사양의 말을 하면, 곧 거절로 받아들인다. 누군가 칭찬했는데 ‘no’라며 부정하면, ‘혹시 (내 칭찬이) 불편한가? 혹시 실수인가?’라고 이해해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도 한다. 단순하게 ‘고맙다’고 응답하는 태도가 오히려 상대를 존중하는 모습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언어 표현 그대로의 의미가 소통의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는, 자기감정과 의사표현을 명확히 하는 능력이 중요하기 마련이다. 갈등 상황에서 자기 입장과 감정, 요구사항을 예의 있게 표현할 줄 아는 법을 어릴 때부터 훈련한다. 반면,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맥락과 비언어적 신호가 소통에서 더 유용하기 때문에 자기표현 능력보다 눈치를 개발하는 게 중요하다. 척하면 척하고 잘 알아들을수록 센스 있고 매력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자기표현보다 공감을 훨씬 중시하고 거듭 강조하며 미덕으로 여기는 건 당연하다.
출처: 인스타그램 gamsung_recharge
3. 타인을 이해하는 법, 나를 표현하는 법
물론 개인주의 문화권에서도 역지사지는 윤리와 갈등 조정, 심리치유의 기본이다. 흄, 아담 스미스, 레비나스 등 많은 서구 철학자가 타인을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하지 말고, 타인 입장과 감정, 사회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윤리적 태도를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타인 관점 전환(perspective-taking), 즉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자기중심적 해석을 내려놓고 타인의 마음과 동기를 통찰하는 노력은, 오히려 자기표현이 서툰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더 요긴하다.
대체로 의사표현이 명확한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오해를 줄이기 위해 애매한 궁금증은 직접 물어 해결한다. 반면, 말하지 않아도 다 통한다는 전제에 익숙한 사회에서는 소위 넘겨짚는 게 쉽지 직접 묻기는 무척 스트레스 받는 일이다. 서툴게 직접 물었다가 오히려 갈등의 골이 깊어질까 두려운 탓이다. 그래서 ‘넘겨짚기’라는 익숙하고 손쉬운 방법을 택한다.
근대 일본 문학가 나쓰메 소세키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던 시기, “풍습과 사고방식이 다른 나라의 방식을 앞선 문명과 가치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면 일본인의 본질과 맞지 않아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서구 문화를 수용하되, 일본인의 관점과 주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개인주의를 한국에 적용하면, 갈등 관계에 있는 타인을 이해할 때 ‘타인 관점 전환’이야말로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자기 표현력을 소홀히 여기는 한국인에게 ‘나의 개인주의’가 아닐까?
더구나 ‘타인 관점 전환’은 자기 입장을 객체화해 상황을 넓게 조망하는 메타인지 훈련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난번 발행글 ‘자기중심을 갖는 일의 아이러니’의 에피소드를 비롯해 『영화로운 개인』 3장은, 바로 이 ‘타인 관점 전환’의 실제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자기표현을 회피하는 구실이 되어 넘겨짚기나 선의의 추론에 머무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타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은, 자기표현에 익숙지 않은 우리가 감정과 의사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추측에 기대는 공감만으로는 진정한 소통이 어렵다. 상대의 말을 사실에 근거해 이해하고, 그 위에서 나의 입장과 감정을 명확히 표현할 때 비로소 관계는 균형을 얻는다. 따라서 객관적 시각을 기르고, 명확한 자기표현의 힘을 키워야 한다.
결국, 한국인으로서 ‘나의 개인주의’란 말하지 않아도 통하길 바라는 습관에서 벗어나, 나를 드러내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용기다. 솔직하되 예의를 갖춰 자신을 표현하고 ‘나’의 자리에서 벗어나 타인의 시선을 받아들이려 할 때, 관계는 비로소 품격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