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퍼드 컴퓨터 음악 박사가 구글 엔지니어로 11년을 버티며 배운 것들
실리콘밸리의 네트워킹 파티, 맥주잔이 부딪히고 뻔한 탐색전이 오갈 때쯤 어김없이 날아오는 질문이 있다.
"잠깐, 전공이 컴퓨터 음악이라고요?"
상대방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친다. '정통 CS(Computer Science)'의 성골들 틈에 낀 이방인을 보는 시선. 처음엔 좀 곤란하고 난처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반응을 즐기는 여유가 생겼다. 많은 이들이 밟아온 매끈한 엘리트 코스와 나의 울퉁불퉁한 이력 사이에는, 쉽게 좁혀질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전업 뮤지션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한동안 대학 강단과 음향 컨설팅을 전전하며 표류하던 시간들. 그 갈증을 채우려 2009년 늦깎이 유학길에 올랐고, 스탠퍼드 CCRMA(컴퓨터 음악 및 음향 연구소)를 거쳐 2014년 구글 크롬 팀에 조인했다. 그렇게 11년. 어느덧 나는 실리콘밸리의 한복판에서 엔지니어링 팀을 이끄는 매니저가 되었다.
이쯤 되면 독자들의 머릿속엔 물음표가 하나 떠오를 것이다.
음악 하던 사람이 구글에서 엔지니어링을 한다고?
이 첫 번째 포스트는 그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자 생존 기록의 시작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역설적이게도 '코딩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박사 과정 시절, 나는 방목된 소처럼 오직 음악적 '창의성' 하나에만 몰두했다. 코드가 좀 엉망이어도 음향적 결과가 새롭고 신선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구글은 달랐다. 그곳에는 거대한 시스템과 프로세스, 그리고 메트릭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최우선이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큰 C++ 오픈소스 프로젝트인 크로미움(Chromium)에서 월드 클래스 엔지니어들과 함께 코드를 작성하고 리뷰를 주고받는 일은 매일이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뮤지션으로서의 자유분방한 창의성을 내려놓고, 엔지니어의 엄격한 규율을 배우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 경험은 완만한 성장 곡선이 아닌 뼈를 깎는 탈바꿈의 시간이었다. 독창성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유지보수가능성(Maintainability)'과 '확장성(Scalability)'의 세계로 강제 이주당한 기분이었다.
그 고통을 견디게 해 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컴퓨터 음악이었다. 내가 작성한 코드가 전 세계 수억 명의 사용자가 쓰는 브라우저 안의 음악도구가 된다는 것. 그 압도적인 '임팩트'와 '스케일'을 체감하며, 나는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렇다면 음악 박사 학위는 쓸모가 없었을까? 반전은 적응기를 마치고 실무 깊숙이 들어갔을 때 일어났다.
"오디오 엔지니어는 일 년에 한 번씩 링 버퍼(Ring Buffer)를 짠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있다. 그만큼 기본적이면서도 까다로운 기술이다. 일반적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에게는 생소한 블랙박스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숨 쉬듯 익숙한 모국어 같은 것이었다.
그 당시 나의 코딩 실력 자체는 시니어들보다 부족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십 년이 넘는 오디오 전문가로서의 도메인 지식 덕에 나는 이 엔지니어링 프로젝트를 왜 해야 하는가, 또한 그 프로젝트의 성공은 어떻게 정의되는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AI가 코딩을 대신해 주는 시대가 올수록 이러한 도메인 지식의 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다. 복잡도가 높지만 도메인 벨류가 낮은 코드의 작성은 AI가 담당하고, 인간은 더 높은 가치 창출에 포커스를 두고 전체적인 프로젝트의 방향을 설정하는 디렉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필자는 음향 관련 웹 표준을 제정하는 W3C 오디오 워킹 그룹의 의장을 맡고 있다. 2014년 실무자로 합류해 표준 문서 편집장(Spec Editor)을 거쳤고, 2021년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취임 직후 가장 먼저 착수한 과제는, 그룹의 방향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었다.
순수 CS 전공자가 주류였던 워킹그룹에서 Web Audio API는 단지 완수해야 할 하나의 '엔지니어링 과제'였다. 그들이 쌓아 올린 디자인은 기능적으로는 빈틈이 없었으나, 뮤지션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직관과는 미묘한 괴리가 있었다. 나는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오랫동안 소리를 다뤄온 사용자로서, 기능 명세서가 아닌 '경험'의 관점에서 API 디자인에 접근했다. 기술과 예술의 경계에 서 있었기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감각의 빈틈'을 메울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오디오 프로그래머들이 다시 웹 플랫폼에 기대를 걸고 새로운 앱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나의 이질적인 배경은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대체 불가능한 자산이었음을.
많은 사람이 한 회사에서 11년을 다녔다고 하면 "지루하지 않냐"라고 묻는다. 하지만 주니어에서 시니어, 테크 리드, 그리고 매니저로 역할이 바뀌며 매일 새로운 문제를 마주했기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엄청난 재능이 아니라, 바닥을 쳐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굳은살, 바로 회복탄력성(Resilience)이었다. 힘들 때마다 나는 과거의 두 가지 기억을 떠올린다. 음악계에서 몇 번이고 사기를 당해 커리어를 포기하게 되었던 기억, 그리고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모멸감 가득한 기억이다.
한 20년 전쯤 대학 전임 강사 시절, 실용음악과의 홍보를 위해 서울의 한 고등학교를 찾아갔을 때였다. 어느 선생님에게 학교 로고가 박힌 손톱깎이 세트와 음료수 상자를 건네며 잘 부탁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발로 내가 가져온 물건을 툭툭 걷어차며 말했다.
"요새 누가 뭐 이런 걸 갖고 오나."
그때의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첫째 아이 생각에 당장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날의 참담함은 내게 많은 생각을 던져주었고, 그 발길질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이곳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엘리트코스를 밟아 왔을 실리콘밸리의 지인들 앞에서 "사기당하고 잡상인 취급받던" 이야기를 하면 다들 신기해한다. 하지만 그 아픈 기억들이야말로 내가 번아웃 없이 40대 후반까지 살아남게 한, 가장 단단한 방패이자 갑옷이다.
스티브 잡스는 창의성을 두고 '그저 사물을 연결하는 것(Creativity is just connecting things)'이라 말했다. 하지만 그 연결은 매끄럽고 평탄한 꽃밭 위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세계가 부딪히고 깎여나가는 그 불편한 경계선 위에서 비로소 혁신은 싹을 틔운다.
만약 당신이 비전공자라서, 혹은 남들과 다른 배경을 가져서 위축되어 있다면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싶다. 당신의 그 '이질적인 과거'는 실패와 도태의 흔적이 아니다. 오히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지점을 짚어낼 미래의 가장 날카로운 무기다.
앞으로 이 블로그를 통해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링 트렌드와 AI 시대의 테크니컬 리더십, 그리고 딴따라 출신 한국인 구글러의 시선으로 본 미국 생활의 단면들을 독자분들과 나누려 한다.
나의 이 투박한 기록들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단단한 근거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