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주택에 살지 않을까"와 "주택에 살지 못할까"
생물학적으로 '산다는 것'은 심장박동이나 뇌의 움직임, 동공의 반응 등 몇 가지 징후로 규정되지만, 인간이 산다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작은 세포에서 시작한 DNA의 활동이 지금의 광대한 생물종을 만들어내듯, '의식주'라는 생필품에서 가랑이지기 시작한 인간의 삶의 가지는 매우 다양한 삶의 형식에 닿아 있다.
문화에 따라 인간은 다른 것을 먹고 다른 것을 입고, 다른 말을 쓰며 산다. 세 가지의 필수요소라고 일컬어지는 의, 식, 주는 각각 옷과 음식과 집이다. 각각의 중요성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저 그것이 이루어지는 물리적 형태를 바라보자면, 먹고, 입고, 사는 행위는 모두 다시 '사는 행위'로 수렴하기에 우리는 이런 필수요소를 '집'에서 해결한다.
집은 그런 곳이다. 과거에는 삶이 출발하는 곳이기도 하고, 삶이 마무리지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병원이 이 두 공간을 대체하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삶의 대부분의 흔적이 집 속에 머물러 있고, 잠을 자는 모든 이는 집이라는 존재를 염두에 두고 일과를 살아간다.
인간이 소유하고자 하는 -심지어 사랑까지도- 모든 것들이 그렇듯, 주거의 목적이 되는 집 또한 그 이상향을 가진다. 꿈의 집은 모두가 다르겠지만, 최근 한국의 조사를 보면 아파트라는 집합건물의 주거형태가 가장 큰 인기다.
아파트 단지는 공동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깨끗한 경우가 많다. 주거지가 모여있는 특성 때문에 자연스레 상인들이 모여 주변에 상점을 연다. 그래서 물건을 사기 쉽고 따라서 생활이 쉬워진다는 이점이 있다. 학교도 가깝다. 주택단지가 계획될 때에는 학교가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주거형태들은 어떤가. 골목길은 어둡고, 언제나 위험하다. 마당이 흙으로 노출돼 있다면 관리가 어렵고 콘크리트로 덮여 있다면 그 효용성이 없다. 집의 유지보수는 온전히 주인의 몫이다. 모든 설비에 대한 책임을 거주자가 진다. 골목은 주차가 엉망이고, 지하철은 멀고, 상점은 분산됐으며 그나마도 망해가고 물건이 줄어들고 있다.
소비자는 합리적이다. 아파트의 주거형태를 택하는 것, 그리고 고가 아파트가 생겨나고 좋은 자리에 전망이 좋은 고층 주택이 생기는 것이 옳아보인다. 관리비를 내면 공용구간은 관리를 해 주고, 관리인이 있어 설비에 대한 자문을 얻기도 쉽다.
그러나 합리적인 것이 곧 자연스러운것일까.
인간을 집단에서 분리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넓은 토지에 자리를 잡아 국가를 건설한 인간이, 그 주거의 확장을 수평으로 하지 않고 수직으로 모아 서로의 위 아래에 사는 것은 자연 스러운가?
혹은 '부동산'으로 부르는 건물의 가격에 본인의 재산을 의탁한 채 그 저변에는 손바닥만한 땅에 기인한 대지권만으로 본인 평생의 노력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자연 스러운가?
아니면 의식주가 행해지고, 가족이 구성되는 '삶의 공간'을 선택할 때, '팔 때의 시세'를 생각하는 행위가 자연스러운가?
우리가 좋아하는 다른 OECD 가입국의 주거 형태를 보더라도 그것은 자연스럽지가 않다.
만약 주택이 가진 고질적인 단점이 먼저 발생하고, 그것의 방지책이 속수무책이라 아파트가 자연스럽게 발전한 과정이라면 일면 이 현상은 일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도시계획에서 주택이 밀려난 것은 오래다.
그 도시계획에서 막대한 자본금을 이익으로 취하는 기업이 있는 한, 그리고 그 상권을 탐내는 거대 유통업체들이 있는 한, 도시민들의 이 기형적인 주거형태와 그 욕망은 곧 그들의 부에 의해 구획된 것이지 인간의 자연적 삶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인간의 의식주는 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주'로 집중해 보면-본인이 흙을 구워서 집을 짓는 원시인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그것은 필시 나의 삶과 어떤 자본이 양자이득을 얻는 형식일 것이고, 거칠게 결론을 내보자면 개인의 삶을 통제하여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고자하는 이가 제시한 스타일에 젖어가는 것이다.
사실 독재자가 똑똑하다면 그의 스타일에 맞춰가는 것이 행복과 배부름의 지름길이다. 그러나 운이 좋지 못한 우리민족은 사실상 모든 것을 충족해주는 독재자를 아직은 만나지 못한 것 같다. 주거 형태에 대한 고정관념과, 삶의 질 보다는 '집의 중고값'에 기대어야 하는 풍토를 만든 데에는 한심한 수준의 노동 현실도 한 몫을 했다.
산다는 것은, 광의의 생명이 아니라 협의의 주거일지라도, 이렇게 복잡하고 간섭이 많다. 이에 냉소할 여지가 있다. 어차피 가장 원하는 이상향의 주거는 이런 간섭속에서 정해진 것이라고. 우리는 아파트를 강요받았고, 그 강요받은 사실을 망각한채로, 주거에 있어서는 타성에 젖은 채 살아가고 있다고 누군가는 확신해야 한다.
그래서 "주택에 살지 않을까"라는 질문은 "주택에 살지 못할까"로 바뀐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