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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도은 Jun 15. 2016

우리는 왜 주택에 살지 못할까

4. 인력引力

여전히


 싼 집을 찾아 대출이 없이 사는 것은 가능하다. 혹은 싼 집을 찾아 비교적 쉽게 대출금을 갚으며 살아나가는 것도 할 수 있다. 가능과 불가능의 문제로 묻는다면 단순한 문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가능하다고 해서 무조건 이뤄지지는 않고, 어렵다고 해서 모든 시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주택에 살지 못한다.





조건


 사람들은 아무 집에나 살지 않는다. 선택 가능한 속에서 조건을 따진다. 예를 들면 출근의 편의, 주변 환경, 안전, 학군 등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어떤 이는 남향집을 선호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풍수지리상 길지吉地를 택하는 사람도 있다.


 그 조건들 속에는 그 문화권 구성원의 생활사와 역사가 담겨 있는 경우도 있다. 전쟁이 잦았던 민족에게는 외적에 대한 수비에 용이한 고지대가, 혹독한 겨울을 가진 북반구 어느 지방에서는 북풍을 막아줄 언덕의 존재가 그 조건이 됐을 수도 있다.



 역사나 지리와 같이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세세한 조건들은 수없이 존재한다. 인간이 이것을 따지는 상황을 경쟁사회에 맞는 비유로 치환해볼 수 있다. 집을 학생으로, 그 조건들을 교과 과목이라고 정하면 설명이 쉽다. 각 과목들의 점수를 매겨 평균점수가 높은 집이 거주지 적합시험에 통과하는 것으로 말이다.




국영수


 이런 가정 속에서 ‘국영수’의 자리는 단연 ‘비용’이 차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비용에 비하면 다른 조건들은 그 점수반영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비용은 중요한 만큼 먼저 고려되기 때문에 그 기준에서 빨리 사라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1차 평가가 ‘비용’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 이 때문에 2차 평가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사소하게 보이는 조건들이 선택의 필수적 요소들이 된다. 비용의 문제를 떠난다면 집의 방향이나 창문의 개수와 같은 것들이 주택을 선택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충분히 합리적인 것 처럼 보인다. 이런 과정은 현재도 유효하다. 그러나 다소 기형적인 요소 한 가지가 이를 방해하며,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의 거주형태를 직접적으로 간섭한다. 간접적으로는 나라 전체가 이로 인해 알지못하는 고통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인력


 그것은 ‘인력引力’이다. 물리 법칙인 ‘만유인력’의 그것과 비슷하다. 다만 보통의 인력의 중심엔 높은 질량의 물체가 존재하지만, 이 경우엔 그 중심에 ‘서울’이 있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사람들은 서울에 살고싶어하고, 그 곳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 끌림 속에 사람들은 서울로 모여들기만 한다. 유독 서울이라는 넓지않은 영역의 공간개념이 거주의 선택을 간섭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고려하던 조건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자칫 국지적으로 보일 수 있는 현상에 ‘인력’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데는 이유가 있다. 범위를 수도권으로 확장하면 전체 인구의 반을 넘는 수를 보아도 국지적이지 않거니와, 이 열망이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주거 조건들을 압도해버리는 거대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서울은 낙제다. 서울의 도로 배치와 교통난은 한심한 수준이고 골목은 엉켜있어 주차는 엉망이다. 도시의 대기는 세계를 통틀어 최악인 수준이다. 국토의 약 1/165의 공간에 국민의 1/5이 거주한다. 이 지옥은 매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물리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수요가 많으니 당연히 물가가 높다. 면적대비 강력범죄의 절대적인 발생수가 최고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쉽사리 그 땅의 조각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이 도시는 오래 전 수평적 확장의 한계에 도달했다. 공간은 수직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늘어난 공간의 개수만큼, 그 가치는 축소된다. 가치는 바닥이지만, 그 값은 하늘을 뚫는다. 첫 번째 고려조건이었던 비용에 있어 최악의 입지다.


 하여 우리는 겨우 까마득한 사다리의 초라한 가로대 하나를 비싼 값에 허락받을 뿐이다. 같은 비용이 드는데도 다른 곳에서 사는 것 보다 가난해진다. 이 빈곤은 놀랍게도 자발적이다.




도시


 물론 도시의 생활에서 오는 즐거움을 무시할 수는 없다. 직장의 개수와 문화생활 등 도시 인프라 또한 작은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삶의 질을 풍부하게 한다. 그러나 결코 유일무이하지 않다.


  이것은 견문의 문제다. 지방으로 눈을 돌린다면 대체되는 공간은 언제나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각 지역에는 훌륭한 도시가 있고, 깨끗한 자연환경과 풍부한 문화생활이 공존하는 곳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같은 비용이라면 서울보다도 더 풍성한 도시적 경험을 누릴 수 있는 곳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게다가 고려의 여지도 늘어난다. 합리적인 비용, 편리한 교통, 가까운 직장과 학교, 거주지의 환경, 산책로, 집의 방향, 층수 등 거주의 조건을 선택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 이 모든 것이 아파트를 향해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 삶의 질을 깊숙이 고려하고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다.


 즉, 적은 비용으로 싼 집을 찾아서 대출 없이 살 수 있는 것이고, 이는 글의 서두부터 말해온 ‘조건’들의 고려가 이 상황에서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서울을 선택하고,  더 큰 비용을 들이면서도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스스로으로 맞이한다.


사람들이 이처럼 서울을 공전하는 이유는 그리 간단하게 답할 수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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