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운동 3법칙
도심, 특히 서울로의 인력은 강력하다. 이는 낙제점인 서울의 부동산 가격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책정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서울을 공전公轉하게 한다. 인력은 힘이다. 힘에는 법칙이 있다. 그 법칙은 고루하지만 보편적이다.
뉴턴의 운동 법칙상 관성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합력合力이 0일 때 그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성질이다. 부동산에도 비슷한 개념을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거주지를 고를 때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는 법과 제도, 수입 등 거주지를 일부 또는 전부 강제하는 물리력과,
둘째는 거주자에게 주어지는 정보들, 곧 시세나 환경에 대한 거주자의 인식이다.
이 외부의 힘들의 합이 0인 거주지는 종종 존재하지만, 가장 많이 존재하는 곳은 서울, 특히 강남일 것이다. 거주지를 잘게 쪼개어 보자면 그 속에서의 움직임은 있을지언정, 주택 수요자들이 원하는 거주 형태는 강남 내지는 기타 서울지역에 잘 구현돼 있을 것이다.
서울에 사는 거주민들이 기타 지역으로의 이전, 직업과 육아, 학교를 포함한 완전한 이주를 꿈꾸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원인으로 학군, 또는 도시화로 인한 생활의 편리를 꼽겠지만 미세먼지 등 환경오염과 지가, 물가 등의 부작용이 분명한데도 전체 재산계층의 집단에서 일어나는 서울 붙박이 현상을 완전히 설명해내는 것은 어렵다. 관성이다.
비서울권, 비도심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도 관성이 있다. 법과 제도가 지역의 거주를 용이하게 하거나, 혹은 자신이 가진 가용 자산과 직업활동의 여부에 따라 작용한다. 이 또한 제로섬의 관성이다.
관성은 정지 상태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물리력과 시세인식 등이 다르게 작용하면 비로소 운동이 시작된다. 외력이 변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도시, 그리고 수도권으로의 거주이전을 지속적으로 원하게 된다. 도시가 감당할 만큼의 '합리적인'이동을 시작한다. 이 움직임의 유지 또한 관성이다.
요약하자면 세 가지다. 서울 등 도심지에서의 붙박이, 비서울 등 비도심의 붙박이, 그리고 거주이전의 과정.
이 세 관성의 속성은 부동산 제도와 정보의 합력이 0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합력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상태는 안정된다. 그러나 정지와 이동의 태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정지와 이동의 시점에는 무슨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향수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감정이다. 고향에 대한 기억이 아름답다면 더 깊어진다. 아이러니 한 것이 있다. 향수는 태어나 살던 곳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란 것이다. 나그네의 길을 택한 이들에게만 용인되는 감정이라고 하겠다.
처음부터 고향 땅이 모든 것을 충족시켜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곳에 머물고자 하는 관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다. 관성이 깨진다.
이 속담은 제로섬 관성을 무시하고 도시로의 상경을 감행하라는 이야기다. 누적된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지만, 정지 상태를 역행하여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분명히 어떤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물리에서 이 작용은 인과관계를 세세히 따질 필요 없이 그냥 일어나기도 하지만, 사회적 이동은 유의미한 원인이 존재하는 인과에 의해 발생한다. 이것을 다시 물리법칙의 말로 바꾸면 ‘작용 반작용’이 아닐까 한다.
산업화가 충분히 진행된 지금의 시점에서 지역은 ‘사회적’으로 낙후돼 있다. ‘사회적’이라는 말을 짚어볼 이유가 있다. 실상 낙후돼 있지 않은 지역 도시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서울의 중심 이외 지역은 ‘지방’으로 규정하는 데에 익숙하고, 서울이 가진 것들 중 지방에 없는 것들을 세세한 속성으로 따져보게 된다. 이 때문에 ‘사회적’으로 낙후돼 있다는 것은 결국 실제 낙후돼 있는 지역을 비롯하여 그 뒤쳐진 상태가 ‘옳다’는, 일종의 견문과 관념의 문제를 포함한 평가다.
만약 지역에 대한 다양성의 이해와 견문이 충실하지 않다면, 다시 말해 ‘지방 대도시’에서 거주해보지 못한 경험자라면, 서울 토박이는 신기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가본 서울 이외 지역의 일부를 통해 그 체험 격차를 타지방까지 확대하려는 양상이다.
반대로 서울 등 도심을 중심으로 생산된 뉴스와 컨텐츠는 지역민으로 하여금 이 ‘낙후성’을 본인의 지역에 낙인찍게 한다. ‘사람은 서울로’ 속담을 재생산하는 셈이다. “지방‘도’ 살만하다”는 주장 속 조사 ‘도’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면 쉽다. 여기에 가끔 상경하여 맛본 서울의 도심관광지성 면모가 격차를 공고히 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지방의 ‘낙후성’이라는 ‘작용’을 만들어 낸다. 이 작용은 서울 지향이라는 ‘반작용’의 원인동력이 된다. 지방 대도시나 소도시와 서울간의 객관적 지역격차, 혹은 우리 국토 전체의 거주지 환경의 실제적 분포와는 상관이 없이 말이다. 수도이전을 맹렬히 방어하고, '관습법'이라는 어이없는 판결도 만들어냈다.
결국 사람들은 움직인다. 이는 물론 물리적인 움직임인 이주移住를 뜻하기도 하겠다. 하지만 단지 눈동자만을 굴리는 작은 움직임으로도 ‘지향’이라는 큰 흐름을 만든다. 공간을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시스템 하에서 삶의 터전에 대한 ‘지향’은 곧 ‘수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수요는 메마른 공급을 만나 가격을 상승시키고, 이 가격 상승의 폭은 다시 지향의 가속도를 불러일으킨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토지에 공급은 없다. 물론 어떤 형식의 공급이 있을 수는 있다. 숲을 개간하거나, 바다를 간척하거나, 공간을 위아래로 확장하여 다른 층을 배정하는 등의 공간에 대한 제공은 주택 사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실상 수요에 비하면 이는 턱없이 부족하다. 토지는 재생산되긴 하지만 결코 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되는 주택은 그 이전주택의 시세와 맞게 조정된다.(여기서 제도는 세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그 시세를 지키기 위해서 일어나는 일들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철조망과 오물투척, 그리고 휴거(휴먼시아 거지) 등으로 공급증가에 따른 혜택은 철저히 방어가 된다.
게다가 공기와 같은 문화적 영역의 ‘서울’은 그 일정 경계점에서 더 이상 팽창되지 않는다. 도심은 과밀화될 뿐 한가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수도의 인구와 주택 공급을 놓고 바라보면 더 이상의 공급은 ‘없다’고 바라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 관성에는 감당할 수 없는 가속도가 붙는다. 역설적이게도 좁은 틈은 빠른 물살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좁디좁은 수도의 공간, 아직까지는 살아볼만한 그 틈을 위해 사람들은 도심으로 이동하고 이것은 다시 가격의 상승을 불러오고 토지 공급의 부족이라는 거대 전제는 이를 가속화시킨다.
마치 사람들은 통발속의 된장을 보고 달려드는 피라미처럼, 도시로 몰려들고, 시세를 알아보고 적당히 타협이 될 만한 지점에서 대출과 함께 멈춘다. 이후 대출금의 상환은 서울에 들어온 후의 관성을 담보한 자기위안의 과정 없이는 너무나 고달프다.
자기위안의 거대 감정은 도시의 꿈으로 치환된다. 도시에서의 삶이 일종의 로망이 돼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이 마치 그래왔던 것처럼, 기술의 총아가 된 듯 살아야 하는 것처럼, 주거를 구획한 갖가지 수단에 갇혀 살면서도 그 ‘라이프 스타일’은 널리 퍼진다. 미끼의 냄새처럼. 그리고 사람들을 유인한다.
서울과 도심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좁은 땅 위에 높은 탑을 짓고 살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주택에 살 수 있게 되는 핵심은 높이 솟은 유리장을 무너뜨려 분산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것은 혁명적인 일들이 다발적으로 발생해야만 이뤄질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