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기억
민방위 훈련 날이었다.
위이이잉- 따가운 사이렌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려댔다. 소녀와 반 학생들은 선생님처럼 책상 아래에 들어가 숨었다. 작은 키가 책상 아래서 버티기 유리하다는 사실이 조금은 소녀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나뭇 가시가 만져지는 까슬한 교실 바닥에 숨었지만 낯선 상황에 모두 흥분한 상태였다. 시끌벅적 요란한 교실 속에서 소녀가 흥분했던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소녀의 대각선 앞자리에서 똑같이 웅크리고 있지만 소녀를 마주한 채로 웃고 있었던 남학생 때문이었다. 지우개 똥, 가정통신문 등으로 소녀를 자주 괴롭히지만 행동과는 다르게 따듯한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던 남학생이었다. 수줍음이 많은 소녀는 속으로는 이미 남학생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지만, 무척이나 순수한 마음 탓에 실제로는 그와 가까이 지내지 못했다. 그의 웃는 입 모양은 특히 소녀의 마음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는 하얀 얼굴에 피어난 채송화같이 예쁜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책상 아래서 그가 뒤돌아보고 따듯한 눈빛과 그 설레는 입모양으로 소녀에게 말했다. "나랑 사귀자." 순간적으로 가슴이 요동치는 느낌에 당황한 소녀는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기분이 들어 고개를 홱 돌렸다.
때로 옥상은 갈 곳 없는 학생들의 쉼터가 되어주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지만 어두운 밤, 서로의 눈동자는 반짝였기에 문제 되지 않았다. 높은 난간에 팔을 기대고 그의 손가락을 따라 별을 보는 따위의 별것 아닌 것으로 둘은 깔깔거렸다. 바람에 의해 옆으로, 뒤로 길게 늘어트려지는 머리카락을 따라 맘껏 웃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른이 된 소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어느 날 시원한 바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녀의 아파트 옥상에 올라왔다. 소녀는 이제 먼 저편의 산과 하늘과 구름을 보고 불안한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바람이 머리를 스쳤다가 두피까지 시원하게 들어왔다를 반복하자 그녀가 잊고 살았던 추억이 꿈틀댔다. 기억 너머 어딘가에 있던 바람결이었다. 눈을 살짝 찡그리며 기억을 더듬어보자 채송화의 미소가 떠올랐다. 흘러가는 바람에 따라 그녀는 오랜만에 어릴 적 소녀의 모습을 상기할 수 있었다.
고향 동네는 곧 그녀의 마음속 세계였다. 동네는 그녀가 자라온 날들을 모두 지켜보았고 그녀의 등하교, 출퇴근 길을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길가의 나무들은 그녀의 친구였다. 그녀가 지칠 때 그늘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외로워할 때는 바람의 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나무의 소리는 그녀의 마음에 깊이 심어져 세상을 보는 눈이 되었다. 동네를 통해 삶의 감사와 동심과 같은 원초적인 무언가를 배웠다. 자신의 세계를 이토록 아름답게 만들어준 고향 동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앞으로 계속 변하게 될 고향이지만
아름다웠던 과거가 기억되고
생생한 현재를 마주하며
찬란한 미래를 그려가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