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여자들] 민지와 장원영, 아이돌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20여 년 만에 아이돌 덕질의 세계에 재입성했다. 클럽 H.O.T 이후 처음으로 팬클럽도 가입하고 덕질 필수품이라는 트위터(현재는 X로 이름을 바꿨다)도 깔았다. 연말에는 갖은 노력 끝에 콘서트도 다녀왔다. 하얀 풍선을 흔들던 공연장에서 3만 원 넘는 응원봉을 흔들며 세월의 변화를 느꼈다. 콘서트에 함께 갔던 남편은 팬들이 실시간으로 공연 영상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2000년대 이후 오랜만에 아이돌 덕질을 하면서 '아이돌은 극한 직업'이라는 말을 체감하고 있다. 왜 그토록 많은 아이돌이 몸과 마음에 위험 신호가 나타나는지 알겠다. 일단 공백기가 없다. 예전 오빠들은 1년에 몇 달만 활동하고 공백기에는 생사를 알 길이 없었는데 요즘 아이돌은 1년에 몇 번씩 컴백을 하는데 공중파 방송 활동은 1~2주밖에 안 한다. 음악 방송 활동에 부수적인 비용이 많이 들어 가성비가 안 나오기도 하고, 굳이 공중파 방송이 아니어도 해야 할 활동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나머지 시간에 아이돌들은 해외 콘서트 투어를 돌고, 인기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고, 자체 유튜브 콘텐츠 제작을 하고, 챌린지를 찍고, SNS를 통해 쉼 없이 팬들과 접촉한다. 주기적으로 라방(라이브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료 팬 소통 플랫폼을 통해 메시지를 보낸다. 일정 수량 이상의 앨범을 구입한 팬들과는 대면 팬사인회뿐만 아니라 '영통팬싸'라는 이름으로 1:1 영상통화 팬사인회도 한다.
이 모든 근황은 영상과 사진으로 남는다. 행동, 발언, 표정 하나하나가 실시간으로 박제돼 빠르게 유통된다. 피곤한 얼굴이나 실수까지도. 아이돌은 숨을 곳이 없다.
▲ 뉴진스(맨 오른쪽이 '칼국수' 논란으로 사과한 민지).
ⓒ 어도어
최근 그룹 '뉴진스' 멤버 민지의 '칼국수 발언 사과문'이 화제가 됐다. 지난해 1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년 전 뉴진스는 유튜브 채널 '침착맨' 라이브 방송에 출연했다. 이 방송에서 민지는 칼국수 관련 질문에 '칼국수가 뭐지?'라고 작게 혼잣말을 했고 해당 발언은 '논란' 영상으로 편집되어 유통됐다.
논란의 요지는 민지가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칼국수 발언은 민지가 마라탕, 비빔면 등을 안 먹어봤다고 말하는 다른 영상과 함께 짜깁기되어 민지를 비난하는 콘텐츠로 확대 재생산됐다. 무려 1년 동안이나.
이에 민지는 지난 2일, 뉴진스 멤버들과 함께한 라이브 방송에서 "여러분 제가 칼국수를 모르겠어요? 제가 모르겠냐고요. 두 번 생각해 보세요"라면서 "여러분들 칼국수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뭐가 들어갔는지 어떤 재료로 만드는지 다 알고 계세요?"라고 다소 격앙된 말투로 항변을 했다. 자신의 발언에 대한 악의적인 논란이 확산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번에는 민지의 태도를 두고 인성 논란이 이어졌다. 팬들과 '기싸움'을 하고 '훈계'를 하려 했다는 것이다. 결국 민지는 장문의 사과문을 올렸다. 지난 16일 민지는 "버니즈(뉴진스 팬덤 애칭) 분들과 소통하는 라이브에서 저의 말투와 태도가 보시는 분들께 불편함을 드렸다"라면서 1년 전 칼국수 발언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답답한 마음에 해명했지만 너무 미숙한 태도로 실망시켜드린 점 스스로도 많이 반성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지는 "이번 일을 통해 제 말 한 마디의 책임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고 많이 배웠다"라고 했다.
대체 민지가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까지 비난을 받은 걸까. 칼국수를 몰랐다고 혼잣말을 했기 때문도 아니고, 칼국수 논란에 '급발진'하며 화를 내서도 아니다. 민지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대중과 팬들에게 즐거움과 행복만 주는 '무해한 아이돌'의 이미지를 배반했다는 데 있다.
아이돌은 대중에게 노출되며 끊임없이 감정노동을 하지만 진짜 감정은 드러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아이돌이 표출해도 되는 감정에는 긍정적인 감정만 허용된다. 화를 내면 인성 논란이 생기고 힘든 티를 내면 태도 논란이 생긴다. 표정이 없으면 영혼이 없거나 무성의하다고 욕먹는다. 늘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슬픔, 우울, 불안, 짜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왜 유독 아이돌에게 불가능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일까.
문화비평서인 <망설이는 사랑>에서 안희제는 "아이돌 아티스트는 단지 팬과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겪는 부정적 감정을 잘 감내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는 "아티스트들에게 특정한 형태의 감정노동을 요구하는 것이 때로 팬들의 권리처럼, 심지어 아이돌 아티스트의 '바른 성장'을 위한 일로까지 여겨진다"라고 덧붙인다.
"이와 더불어 어떤 이들은 아이돌 아티스트에게 '그만큼 버니까 그 정도 욕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욕이라는 부정적 관심도 돈이 된다고 전제하는 동시에('무플보다 악플이 낫다'), 욕을 감수하는 감정노동을 기꺼이 수행하길 요구한다." - 안희제 <망설이는 사랑> 중에서
2022년 평균 연령 17세로 데뷔한 뉴진스는 밝고 무해한 콘셉트로 큰 사랑을 받았다. 뉴진스의 리더이자 가장 연장자인 민지는 영어를 잘하고 똑부러지는 캐릭터로 알려졌지만 그 똑똑함이 자신을 둘러싼 논란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데 활용되자 문제가 됐다. 아이돌에게 기대되는 똑똑함은 공격성이 소거된 똑똑함이다. 설사 부당함을 토로하더라도 친절함과 다정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의 없다', '건방지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민지가 사과문을 올린 다음 날인 17일, 또 다른 걸그룹인 '아이브'의 장원영이 유튜브 채널 '탈덕수용소'를 상대로 낸 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탈덕수용소는 연예인들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과 허위 사실을 유포해 수익을 얻은 대표적인 '사이버 렉카' 채널이다. 사이버 렉카는 부정적인 이슈를 보고 달려드는 '레커차'처럼 연예인에 대한 악성 루머를 생산해 조회수를 올리는 유튜버를 뜻한다.
중학생이었던 2018년에 데뷔한 이래로 장원영은 유명세만큼이나 수많은 억지 논란에 휩싸였다. 탈덕수용소의 악의성과 허위성의 강도가 심각했을 뿐, SNS에서 조금만 검색해 봐도 장원영의 찰나의 표정이나 말투, 행동을 편집해 자극적인 썸네일과 함께 조회수를 올리는 콘텐츠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이돌의 인성과 태도에 대해 맥락이 제거된 논란을 만들어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것이다. 관심을 유도해 돈을 버는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에서는 윤리도 진실도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칼국수 논란'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란이 1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십성 콘텐츠를 무비판적으로 소비한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올라온 아이돌 논란 영상을 가볍게 클릭하면서 '얘 뭐야?', '얘는 그럴 것 같았어'라고 즉각적인 판단을 내렸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나의 논란이 사그라지면 또 다른 논란이 생겼고, 가십을 소비할수록 도파민이 분비됐다. 하지만 영상을 직접 제작하거나 댓글을 달지 않았기에 나는 이 모든 논란과 무관하다고 믿었다. 나는 무해하다고.
데뷔 후 6년간 온갖 논란을 견디다 악성 유튜버와의 소송에서 승소한 장원영에게는 '멘탈갑'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사실 장원영의 승소는 사이버 렉카에 대한 소속사 스타쉽의 집요한 추적과 강경한 대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든 소속사가 스타쉽처럼 아티스트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아이돌이 장원영처럼 자신을 둘러싼 비방을 오랜 기간 참을 수 있는 것도, 참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장원영에게 보내는 '멘탈갑'이라는 찬사가 씁쓸한 이유다. 민지도 장원영도 2004년생으로 지난해 성인이 됐다.
뉴진스의 소속사 어도어는 '뉴진스 권익 보호 관련 안내문'을 공지하면서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뉴진스 멤버들과 관련한 악성 댓글, 악의적 비방, 모욕,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등의 행위에 대해 상시적으로 법적 대응 중에 있다"라고 했다. 이어 "비단 이러한 법적 대응 공지로 인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더 이상의 무분별한 억측과 악의적 비방은 삼가 주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아이돌 논란 뒤에는 사람이 있다. 나처럼, 당신처럼 인격을 가진 사람이. 이 글은 나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TV·OTT, 유튜브 등 영상 매체 속 심상치 않은 여자들을 사심 가득 담아 탐구합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