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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Sep 25. 2024

남편의 말, 아들의 말

인생 노잼 시기 

-인생에는 종종 '노잼 시기'가 찾아온다. 모든 게 재미없고 지겨워서 한숨 푹푹 쉬며 '하기 싫다, 하기 싫다'를 되뇌는 시기. 의욕이라고는 놀고 싶고 쉬고 싶은 의욕밖에 안 남는 시기. 요즘 내가 그 노잼 시기를 겪고 있다. 주로 집에서 일하는데 자꾸만 땅굴을 파고 들어가게 되길래 옆방에서 재택근무하는 남편에게 제안했다. "나랑 느좋카(느낌좋은카페) 가서 일할래?" 


'느좋카'에서@홍밀밀


-나를 내가 믿을 수 없으니 강제로라도 환경을 만드는 수밖에. 남편과 자전거를 타고 옆동네 카페에 갔다. 

바람을 가로지르며 달리는데 속이 좀 뚫리는 것 같았다. 남편에게 "일이 너무 하기 싫고 재미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하냐"라고 물었다. 남편은 그런 마음이라면 본인이 전문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미룰 때까지 미뤄. 언제 해주냐고 전화가 계속 걸려오는데 하기 싫고 지겨운 게 어딨냐. 어떻게든 해내든지 망하든지 둘 중 하나지. 그래도 후자는 잘 일어나지 않아." 


-할 일이 잔뜩 쌓여 있는데도 소파에 멍하니 않아 휴대폰만 계속 들여다보던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일을 미루는 게 더 괴로운 나는 '쟤는 대체 어쩌려고 저러나' 싶어서 속이 터졌던 기억이 났다. 신기한 건 남편은 그랬다가도 (벼락치기로) 어쨌든 일을 해내기는 해냈고 지금까지 무사히(?) 커리어를 이어오고 있다. 다만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었다. 남편은 자신의 삶을 '위기주도형'이라고 말했다. 위기를 위기로 극복하는 삶. 


-인생의 큰 가르침을 하나 더 알려주겠다는 거만한 얼굴로, 남편은 무슨 드라마인지 영화인지에서 이런 대사가 있다면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밑바닥에 가든지! 왕이 되든지! 인생은 둘 중 하나야! 니는 밑바닥에 갈끼가! 왕이 될 끼가! 밀밀아, 니는 왕이 돼야지!" 


맥락을 알 수 없는 연기에 푸하핫 웃고 말았다. 밑도 끝도 없는 개그 코드가 잘 맞아서 내가 이 사람이랑 같이 사는구나. 왕이 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는데. 그렇다고 밑바닥에 가고 싶지도 않고. 그냥 적당히 살고 싶은데 왜 이리 어려운지.  


-남편이 '하기 싫다, 하기 싫다'를 연발하며 대학원에 수업을 들으러 가고, 아홉 살 아이와 둘이 저녁 시간을 보냈다. 자기 전에 <해리포터>를 읽어주고 불을 끄고는 침대에 누워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날날이에게 학교에서 혹시 고민이 있냐고 묻자 엄마는 고민이 없냐고 묻는다. 


"엄마는 요즘 고민이 많아."

"뭐가 고민인데?"

"그냥 다 하기 싫고 재미가 없어."

"음 그럼... 힘들면 연휴(아마도 휴가)를 좀 많이 내봐. 여유로운 티타임도 좀 가지고. 나도 가끔은 도심을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어."  


어째 어른이랑 애가 바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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