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판을 못 떠나나
-민희진의 기자회견에서 케이팝의 심연을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는데 더 깊은 심연이 있었나 보다. 커뮤니티나 트위터에서 나누는 험담 수준의 저열한 문서가 무려 엔터 대기업의 임원 보고용 문서라는 것도 황당하지만, 명백한 피해자인 아이돌의 실명을 공개하면서 ‘하이브가 얘를 이렇게 씹었대’라며 2차, 3차 가해를 하는 것도 한심스럽다. 문제의 그 문서에도, 그 문서를 대하는 태도에도 인간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다. 뒷담화를 기록하고 돌려본 것은 분명 문제이지만 아이돌을 상품으로 취급하고 품평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인식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말로 하이브만 문제인가.
-대부분의 아이돌이 침묵하는 가운데 한 아이돌이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당신들의 아이템이 아니다. 맘대로 쓰고 누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했음에도 언론에서는 ‘저격’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저격. 너무나 자극적이고 너무나 가벼운 말. 모든 사안을 그저 싸움판으로 만들어버리는 말. 우리는 싸움 중계하며 구경이나 하겠다는 무책임한 말.
-누군가의 진심과 용기가 가십으로 소모되고 조롱받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괴롭다. 그것이 언론의 생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나 역시 그 언론에 몸담았던 사람임에도. 그런 의미에서 한때는 기존과는 다른 깊이 있고 통찰력 있는 연예매체를 이끌었던 사람이 저런 문서를 작성했다는 것이 개탄스럽다. 그가 정성껏 작성했던 기사를 정독하던 시절이 있었기에 더욱더.
-아이돌의 셀카 한 장, 메시지 하나까지 모두 상업화되어 돈을 쓸 때만 의미 있는 존재로 호명되는 팬들을 지켜보는 것도 지친다. 콘서트, 팬미팅 티켓팅을 할 때마다 업자들이 끼어들고 중고등학생들이 수십 만원씩 사기 피해를 입는다. 왜 누군가의 사랑은 약점이 되는 걸까.
-기획사는 팬들을 '돈줄'로 보고 돈을 쓴 팬들은 ‘내가 이만큼 돈을 썼는데 너희는 왜 팬을 우습게 아냐’라고 권리를 주장하다 못해 근조 화환 시위를 한다. 끔찍한 짓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것도 모른다.
-여기에 인권이 없고 상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보다 더 본질적이고 오래 남을 것을 붙들어야 하는 걸 안다. 그럼에도 왜 나는 이 판을 못 떠나나. 일 년에 몇 번씩 컴백을 하고 해외 투어를 돌고 끝도 없이 팬사인회를 하며 혹사당하면서도 사생활도 없이 늘 웃어야 하고 외모와 행실 관리를 해야 하고 자신의 생각조차 제대로 밝힐 수 없는 아이돌을 왜 나는 계속 좋아하나. 나는 왜 그런 아이돌에게 위로를 받고 자주 행복해지나. 왜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그들이 무대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나. 착잡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