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
인연의 유효 기간이 이미 끝나버린 사람과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마주쳤을 때의 열패감을 알고 있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나는 이전의 세계에서 요만큼도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대해.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라고 했던 은중과 상연의 인연이 번번이 다시 이어질 때마다 옅은 한숨이 났다. 돌고 돌아 결국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친구가 되어 한 세계를 공유했다는 건 삶의 취향이나 지향점이 그만큼 비슷했음을 의미한다. 마음먹고 머리를 잘라 봐도 귀밑과 어깨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리 다짐을 하고 새로운 도전을 해도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가끔은 내가 조금씩 다른 버전의 나를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나라는 그리고 너라는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 수도.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윤리적 기준에 집착하는 은중, 자기 연민에 빠져 위악을 부리면서 외롭다 말하는 상연. 드라마를 보면서 꼴 보기 싫을 정도로 은중과 상연의 얼굴에서 내 모습이 겹쳤다. 내가 사랑하고 미워했던 내 인생의 은중과 상연(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지긋지긋하고 괴로우면서도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건, 그럼에도 인물들이 변화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미숙하고 완고했던 과거의 나를 배반하며,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인연이 끝난 자리가 폐허인 줄 알았는데 그 모든 시간이 어떤 식으로든 내 안에 남았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바닥까지 무너지는 박지현의 얼굴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