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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한슬 Jun 29. 2022

제주 사우나에서 인생 최고의 세신 받은 썰 푼다

삼만원만 내면 온몸에 물광이 흐르고 여독을 싹 내려줘

11박 12일 제주 여행을 하며 나는 착실하게 꼬질꼬질해졌다. 매일 샤워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주요 사유는 선크림과 선탠. 서울경기는 비가 온다는데 제주는 사람을 구워 죽이려나 싶을 정도의 햇살이 쏟아졌다. 최소 두 시간에 한 번씩은 자외선 대책을 해야 하니 켜켜이 각질이 쌓일 수밖에.


상태가 안 좋은 건 피부 표면만이 아니었다. 서핑, 스노클링, 바다 수영, 실내 수영을 거의 매일 하다보니 목 어깨 등 무릎도 쑤시고 뻣뻣해졌다. 나이 먹으니까 실컷 노는 것도 쉽지 않다. 물리적으로.


그래서, 사우나를 찾았다. 제주시 탑동의 탑사우나.



여길 고른 이유는 별 거 없었다. 일단 숙소와 가장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묵은 때를 벗기기 위해 세신을 받을 작정이었는데, 네이버 블로그 리뷰 중에 '제주시에서 세신비가 가장 싸다'는 내용이 있었다.


여탕에 들어가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건물에서 내가 가장 어리다는 걸... 30대는 커녕 40대도 없었다. 50대부터 갑자기 시작되는 징검다리식 인구 구성. 세신사가 전체 탕을 향해 "아가씨"라고 부르면 돌아볼 사람이 나 밖에 없었다.


세신을 하고 싶다고 쭈뼛쭈뼛 물어봤더니 이미 누군가가 세신을 받고 계셔서 끝나야 할 수 있다고. 알고 보니 보통은 미리 문자나 전화로 세신 받을 수 있는지 체크하고 온다는 것 같다. 뜨내기 관광객이 알 수 없는 지역 목욕 상식... 다른 데도 원래 이런지도...


무려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렸는데, 의외로 심심하진 않았다. 


먼저 때를 불리려고 들어간 온탕이 내 취향에 딱 맞는 온도였다! 담글 때는 약간 따끔할 정도로 뜨겁고, 오래 잠겨 있어도 미적지근해지 않는, 내 오랜 온천 경험으로 볼 때 약 41도 정도의 온도. 온탕치고는 조금 뜨거운 편이라 여기가 열탕인가? 싶었는데 잘 둘러보니 구석에 열탕은 따로 있었다. 커다랗고 빨간 궁서체로 "미성년자 출입금지"라고 쓰여있었다. 대체 얼마나 뜨겁길래? 12년 전부터 미성년자가 아니지만 감히 발도 담글 엄두가 나지 않는 박력이었다...


온탕이라고 해도 15분이 지나면 슬슬 뇌가 익는 기분이 든다. 웬만하면 냉탕에 들어가지 않고 푹푹 불리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느낌이라 부득이하게 식혀야 했다. 냉탕도 또 온도가 절묘했다. 20~21도 정도 예상. 뜨거워졌던 몸을 정수리까지 푹 담갔다가 일어나면, 기관지부터 기도를 통해 코끝까지, PCR 테스트의 반대 방향 경로가 후욱 짜릿해진다. 없던 비염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 코로 멘솔을 흡입하면 이런 느낌일까? 굉장히 중독성 있다. 자꾸 해보게 되더라...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온탕에 늘어져 있으면 옆에서 딱히 작지 않은 목소리로 나누는 담소가 다 들려온다. 그러나 제주말이기 때문에 10% 정도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 건물 안에서 제주말을 못 하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근데 내가 알아들은 10%의 구절이 심상치가 않았다. "두 번째 결혼했으니..." "여자가 귀한 동네라..." "남자는 아니지만 여자는 그래도..." 어쩌구 저쩌구. 뭔진 모르지만 자극적이었다. 10%만으로도 흥미진진했다.


30분 정도 지났을 때 아기 둘을 데리고 온 젊은 엄마가 있었다. 아기 이모, 할머니와 함께. 그 젊은 엄마와 이모는 내 또래거나 나보다 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 한 명은 세네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기였고 한 명은 돌이 된 남자 아기였다. 왜 돌인 걸 아느냐. 당연히 들어오자마자 어르신들께서 5분 안에 호구조사를 끝내셨기 때문이다. "몇 개월?" "돌이요~" "그래~ 네 살까지는 들어올 수 있지."


나는 곧 동네 목욕탕 여탕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예스키즈존, 키즈웰컴존, 키즈파크를 능가하는 키즈짱짱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만렙 찍은 지 오래 돼서 "요즘 콘텐츠가 없네~" 하는 육아고인물, 자발적 베이비시터들이 즐비한 곳... 돌 된 아기가 물이 좋아서 익룡소리를 질러도 그저 흐뭇하게 웃고, 엄마가 누나 닦이는 동안 서러워서 울부짖으면 다같이 "어이구 어이구" "옳지 옳지" 하면서 달래주었다. 그러면 아기는 울음을 뚝 그쳤다. 내가 아기라도 갑자기 그 많은 나체 할머니들로부터 떼창 응원을 받게 되면 놀라서 울음이 멎을 것 같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계속 흘끔흘끔 내 앞의 세신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체크했다. 아무래도 그분은 세신(3만원)이 아니라 전신마사지(5만원)를 받고 계신 듯 했다. 그 기술이 또한 엄청났는데, 어느 시점에는 세신사가 손님의 엉덩이 위에 무릎을 꿇고 올라가서 (엉덩이 한 짝당 무릎 한 쪽) 매우 큰 규모의 꾹꾹이를 하는 것처럼 번갈아 짓밟고 있었다... 팔꿈치로 하다 못해 무릎으로...?! 세신사도 노인, 받는 손님도 노인인데 엄청난 박력과 에너지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오래 걸렸다. 최소 90분 정도는 받는 것 같았다. 무슨 반얀트리 스파 마사지급으로 몸을 끼워맞춰주는 느낌인데 단돈 5만원이라니!


드디어 손님이 일어났다. 세신사는 침대를 슥슥 헹구고 닦더니 나에게 말 한마디 없이 슬쩍 눈짓을 보냈다. 그 전부터 내가 체크할 때마다 슬쩍슬쩍 눈이 맞았던 것이 세신사도 나를 신경쓰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 기다리는지 포기하고 가버리는지. 존버한 끝에 내 차례가 된 것이다.


침대에 눕자마자 세신사는 다짜고짜 내 윗배 근육을 붙잡았다. 너무너무 아팠다. 아마 마사지였던 것 같은데, 쓰레기 같은 내 몸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으어어어으어" "아이구 이런 데가 다 뭉쳤네" 


다음은 목과 어깨였다. 모든 사무직이 그렇듯이, 안 뭉친 데가 없는 내 몸뚱이 중에서도 특별히 쓰레기 같은 곳이다.  "으아아으아아아" "아이구 만지는 데마다 아프다네. 어떵할간?"


그렇게 레벨 체크(?)를 하신 뒤에는 오일인지 크림인지 비누인지를 손에 바르시고 얼굴 마사지를 시작하셨다. 그런데 이 페이셜, 심상치 않다. 분명 맨손으로 스크럽도 아닌 제품을 얼굴에 문지르고 있을 뿐인데 각질이 싹싹 벗겨졌다. 딥마스크팩보다 나았다. 순식간에 내 얼굴에 각질이 쌓여갔다.


그 다음에는 경락 마사지를 시작하셨는데, 이게 진짜 신의 손이었다. 막 주먹을 살짝 쥔 상태에서 손가락 두번째 관절로 코와 광대 주변을 문지르면서 새끼손가락은 살짝 힘을 푼 채로 토도독, 토도독 부딪히는데 그 정교한 움직임은 앞으로 한 500년 정도는 기계로 구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검지손가락 등 쪽으로 내 볼의 피하지방을 드르륵 드르륵, 아주 작은 샌드백을 치는 것처럼 재빠르게 훑고 지나가며 갖고 노시는데 장난 아니었다. 대체 이게 무슨 기술이지... 


이렇게 본격적인 얼굴 마사지를 받게 되자 '혹시 내가 세신(3만원)을 받고 싶다고 했는데 전신마사지(5만원)을 하고 싶다고 잘못 알아들으신 걸까?'라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나는 빠르게 판단했다. '만일 그렇다면 기쁜 마음으로 5만원을 드려야지...' 5분 간의 얼굴 마사지만으로도 5만원을 기꺼이 낼 수 있었다.


그 기세로 뒤통수와 목이 이어지는 곳, 어깨까지 꾹꾹 마사지해 주신 다음, 목욕탕 특유의 얇은 수건으로 내 뒤통수를 싹싹 말아서 침대에 기대두셨는데, 이 각도가 또 굉장히 절묘했다. 약간 '나는 친구가 없어' 짤처럼 내 턱살이 내 목젖을 누르는 느낌이었는데 묘하게 경추는 엄청나게 편안한... 여기서 이미 나는 잠들 뻔했다.



그 다음은 때타올을 고르라고 하셨다. "센 거, 연한 거 있는데 연한 걸로 할게?" 이미 내가 쪼렙인 걸 눈치채신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이 근처 살언?" "아니용..."

"어디?" "서울 살아요"

"누구 보러 완? 누구 함께 완? (누구 보러 왔냐, 누구랑 같이 왔냐는 거 같은데 내가 제대로 못 알아듣자) 놀러완?"

"네, 놀러 왔어요"

"근데 어찌 사우나를 왔어?"

"어... 너무 많이 놀아서 피곤해가지구..."


여기서 세신사가 한 번 빵 터지셨다. 그러고 내 몸에 적당히 미적지근한 물을 바가지로 부으시며 "물은 이 정도?" 하고 온도 괜찮은지 체크해 주셨다. 그 다음에도 몇 가지 친절하게 말을 거셨는데, 내가 약간 비몽사몽이라 제대로 알아듣고 대답을 한 건지 자신이 없다. 얼굴에 보습 마스크팩을 얹고, 눈에 차가운 타올을 올리고 (정말 기분이 좋다) 본격적인 세신을 시작하셨다.


세신은 약한 걸 고르셔서인지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도 각질이 싹싹 벗겨져 나갔다. 이렇게 다시 태어나는구나. 삼만원만에 예수처럼 부활하는 것인가. 특히 벅벅 문대고 적절하게 미지근한 물로 촥 헹굼 당할 때 정말 짜릿했다. 내가 심즈4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였다면 정수리에서 불꽃이 터지고 있었을 것이다. 세신사는 뜨내기 관광객에게 엄청나게 친절하셔서, 몸을 뒤집을 때도 툭툭 치지 않고 친절하게 "이제 옆으로~" "반대쪽~" "엎드리고~" 하면서 안내해주셨다.


세신을 다 하고도 아직 끝이 아니었다. 얼굴에 무슨 초코향이 나는 크림을 듬뿍 발라놓으시더니, 전신에 비누칠을 하면서 마사지를 시작하셨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전신마사지(5만원)가 아니고 세신(3만원)을 주문한 것인데... 너무 푸짐한 나머지 이 메뉴가 맞는지 헷갈리는 순간이었다. 잘은 몰라도 그냥 세신 코스에도 기본으로 들어가는 마사지가 있는 것 같다. 마치 비빔냉면 시켜도 육수 따로 주는 것처럼... 근데 그냥 육수가 아니고 너무 고급진... 왜냐면 기본 마사지라고 대충 하는 게 아니고 막 팔꿈치로 꾹꾹 눌러가면서 상체 하체 팔다리 손발까지 빠지는 데 없이 꼼꼼하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 마사지 스킬이 정말 대단한 게, 중간 중간 절묘한 타이밍에 뽁! 소리를 내면서 손을 약간 동그랗게 말아서 팡! 박수치듯이 내 살을 치는데 그게 진짜 기분이 좋다. 손바닥 뚜두둑 할 때도 진짜 시원했다. 내 목 뒤에 팔을 엑스자로 받쳐서 꾹 누르면서 일으켜 앉힌 다음에 "좀 땡길게~"하시고 나서 침대 위에 앉은 내 몸 전체를 쭈욱 당기시면 놀이기구처럼 침대 위를 쭉 미끄러져 뒤로 간다. 재미있었다. 그 동안 내내 나는 '아, 역시 5만원을 내야겠다' 라는 생각만 계속 하고 있었다.


가격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처음에 말했듯이 나는 세신이 저렴하다는 정보를 보고 이 사우나에 온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 리뷰는 남성 고객이 쓴 거였다. 리뷰에 따르면 남성 세신은 1만5천원이라고 한다. 여성 세신은 그 두 배다. 나는 평소 미용실에서 여성 커트가 남성 커트보다 천원만 비싸도 역정을 내는, 핑크택스에 매우 민감한 사람인데, 이번 경우는 애매했다. 왜냐면 남성들에게도 이런 마사지, 특히 페이셜 마사지를 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1만5천원을 더 내고 페이셜을 꼭 받고 말 것이기 때문에... 핑크택스가 아니고 그냥 적절한 가격 같았다.


거짓말이다. 적절하지 않다. 사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헐값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다음 달 예매해 둔 뮤지컬 표 한 장만 팔면 이 세신을 네 번 받을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브로드웨이 별 거 아니다. 세신이 짱이다. 대한민국은 세신을 수출해야 한다. 케이팝과 봉준호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 정도의 예술은 못 한다. 몸과 마음이 물리적으로 정화되는 한 시간의 기적. 요즘 주말 점심 시간대에 멀티플렉스에서 영화 한 편 보려면 2만7천원을 내야 한다는데... 나는 그냥 3만원 내고 세신 받으러 갈 거다.


만약 이 세신사가 200살까지 영업하지 않으면 이 분의 기술은 전수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일까? 참을 수 없다. 해녀학교처럼 세신학교를 만들어서 대대로 전수해야 하는 것 아닌지... 무형문화재로 등록하고 연금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지... 황홀한 마사지를 받으며 끝없이 이런 생각을 했다.


다 받고 일어서서 거울을 보니 내 몸에서 물광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충격적인 한 시간이었다. 뜨내기 답게 쭈뼛거리면서 계산은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니까 "나가서~ 응~" 이러셨는데 정작 밖의 카운터에서는 "그건 세신하는 사람한테 줘야지, 우리랑은 아무 상관 없어"라고 하셨다. 아마 나가서 짐을 챙겨서 돈을 가지고 들어오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현금은 한 푼도 없어서, 난생 처음 폰을 가지고 여탕에 들어가서, 계좌이체로 드려도 되냐고 물었다. 당연히 된다면서 계좌를 바로 불러주셨다. 나는 그래서 그 분의 성함도 알게 되었다(...) 다음에 가면 지명해야지...


우리 동네에도 이런 목욕탕 있으면 정말 목욕권 끊어놓고 일주일에 두 번 올 것 같다. 실제로 동네 분들은 그러신 것 같다. 목욕하고 나가시면서 "내일 봐~"하고 인사하시더라. 목욕 덕후들의 소굴인 것 같다.


목욕탕의 장점은 새벽부터 영업한다는 것이다. 나는 서울 가는 날 새벽에 꼭 여기 다시 올 거다. 그 때는 반드시 전신마사지(5만원)을 체험해 볼 것이다. 탑사우나는 공항과 가깝기 때문에, 여독을 풀고 공항에 가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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