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힝고 May 25. 2018

‘미필적 인식’ 이 대체 뭔가요?

시대착오적인 법무부의 ‘젠더 통제’ 를 비판하며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법무부의 변론요지서 내용은 그 전반적인 인식 수준에 할 말을 잃게 만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뜨악했던 것은 ‘미필적 인식’ 이라는 용어의 사용이었다. 미필적 고의와 인식 있는 과실이란 것은 있어도 미필적 인식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우선 법무부가 제출한 변론요지서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법무부는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통상 임신은 남녀 성교에 따라 이뤄지는 것으로, 강간 등의 사유를 제외한 자의에 의한 성교는 응당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므로 이에 따른 임신을 가리켜 원하지 않은 임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미필적 고의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의 행위로 인해 어떤 범죄 결과가 일어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 결과의 발생을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심리 상태” 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를 준용하여 위에 기술된 법무부의 변론요지서 내용을 해석하면, 결국 자의에 의한 성관계로 인해 임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성관계를 했으므로, 그 행위의 결과로써 나타난 임신을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미필적 인식’ 을 판결의 근거로 삼았던 법원의 판례 몇을 살펴보면, 법원은 미필적 인식을 확정적 인식과 미인식 그 어드메께에 위치한 애매한 인식 상태로 보고 있다.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경우 자신이 말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허위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말했기 때문에 유죄가 성립되었다. 또한 지난 1995년 대법원은 장물취득죄의 적용에 있어 ‘이 물건은 장물일지도 모른다’ 는 의심을 했던 정황만 발견되더라도 이를 미필적 인식의 근거로 삼아 해당 물건을 장물로 삼을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아시겠지만 미필적 인식의 적용 범위는 대단히 애매하고 칼자루 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고무줄처럼 적용될 수 있다. 때문에 법원에서도 미필적 인식을 근거로 특정 행동을 유죄로 적용한 케이스는 아주 적다. 게다가 2012년 대선 때 법원은 학교 내 부재자 투표소 주변에서 피자를 돌렸던 대학교수를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내릴 때도 미필적 인식을 근거로 댔는데, 이 판결은 상당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렇게 정의도 불분명하고 잘 쓰이지도 않는 개념을 변론요지서에 쓴 것도 그렇지만, 대체 법무부는 무슨 생각으로 섹스를 할 때 임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내가 그 임신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대담하게 연결시켰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섹스의 목적이 오직 임신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혹시 모르기라도 하는 것인가? 아니 그보다, 특정 개인이 범죄 행위가 아닌 무엇을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그 자의를 법무부가 인식을 근거로 판단할 권한이 대체 어디 있는가 말이다.

기본적으로 섹스를 임신과 출산으로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사고 자체부터가 문제가 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행위를 단순히 번식행위로써 섹스의 결과물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결국 여성을 인구통제의 도구로 바라보는 가부장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섹스는 혼자 하는 게 아닌데 왜 낙태를 여성의 책임 방기로 규정짓는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행 낙태죄는 폐지되고 모자보건법은 전면 개정되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숨겨졌던 ‘안네의 일기’ 에는 어떤 내용이?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