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와닿은
영화 <헤어질 결심>에 대하여
스포일러 주의
박찬욱 감독의 작품을 보려고 할 때 기대하게 되는 몇 가지 키워드들이 있다. 복수, 비밀, 부조리, 여성 서사.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이런 키워드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였다. 전작들이 복수와 비밀로 이루어진 복잡한 서사를 가졌다면, 헤어질 결심은 일직선의 단순한 누아르물, 혹은 멜로물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 단조로운 서사에서는 부조리를 찾기도 어려워 보인다. 또한, 전작에서 복수, 정치, 욕망, 살인을 했던 여성 캐릭터들과 달리 헤어질 결심에서의 서래는 자살을 택하고 만다.
헤어질 결심은 이런 것들의 빈자리를 대신해 수많은 시각적 자극을 선사한다. 이전 화면의 잔상이 남아있는 듯한 트랜지션, 얇은 막을 재현한 사물의 시점숏, 쉴 틈 없이 또 다른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들, 극 중 캐릭터뿐만 아니라 관객까지 현혹하는 색상의 향연, 대비/대조의 구조로 연결되는 인물, 서사, 이미지까지. 영화를 한 번 봐서는 보는 것보다 놓치는 게 더 많을 정도로 복잡하고 화려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영화적 순간들의 이미지들을 모조리 정리해보려고 했다. 이걸 다 정리하고 나면 사람들이 감탄하는 무언가가 나에게도 보일까. 언제나 그렇듯 영화가 좋긴 좋은데 뭐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는 이 감정을 설명할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영알못의 일종의 몸부림을 부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일부 평론가의 말에 설득되면서 이 작업을 중단했다.
무언가를 보았지만, 끝내 무엇도 보지 못했다. 감춰졌기 때문이 아니라, 차라리 투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너무나 선명해서 도리어 낯설다. 미스터리 없이 미스터리하고, 비밀 없이 비밀스럽다. 그러다가 마침내 감정을 서서히 퍼뜨린다.
- 김소희 평론가의 '헤어질 결심' 세팅을 교란하는 사랑의 기쁨과 슬픔 중
숨은 그림 찾기는 보너스게임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이미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을 보고 들은 뒤 응시할 곳은 영화가 아니라 질문을 이어나갈 대상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 송경원 기자의 '헤어질 결심'과 '탑건: 매버릭'에 대한 뒤늦은 소고 중
'이 영화에 과연 나만 모르는 무슨 비밀이 있긴 할까?'라는 의심은 결국 '없다'라는 확신이 되었다. 그리고 모든 이미지를 정리해 보려던 노력은 오로지 '왜?'라는 '단일한' 의문으로 대체되었다. 왜 박찬욱 감독은 이리도 단순한 서사에 이렇게나 다채롭고 화려한 영화적 장치들을 수놓았을까? 여기에 어떠한 비밀도 없다면 이 이미지들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고민을 하던 찰나에 유튜브 영상 하나가 눈에 띄었다.
리틀 드러머 걸 이후에는 그런 컨텍스트가 복잡하게 없고 아주 단순한 사랑 이야기, 아주 순수한 이야기. 여기서 순수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뭐 동심의 세계를 그린다는 뜻이 아니고요. 영화의 메세지랄까요? 이런 것 없이 그냥 영화를 영화이게 만드는 그런 핵심적인 요소로만 이루어진, 그런 히치콕적인 의미에서의 순수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 FM 영화음악 김세윤입니다 / MBC 220625 방송
헤어질 결심의 의미와 메세지를 찾아 헤매던 나는 박찬욱 감독님에게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얼마 전에 우연히 들었던 봉준호 감독의 말이 연이어 떠올랐다.
근데 (영화가) 메시지의 도구로 전락해선 안 되겠죠.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될 것 같아요. 그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메시지가 비에 젖은 옷을 집에 입고 들어갔을 때 젖어있듯이 그렇게 젖어있으면 좋은 거겠죠. 메시지를 앞세워서 계속해서 영화가 구호를 외쳐대면 옛날 싸구려 프로파간다 영화처럼 돼서는 안 되겠죠. 영화 자체의 아름다움이 충만한데 보고 났을 때 그거를 자꾸 생각하게 되고 만든 사람이 하고자 하는 얘기도 어렴풋이 느껴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작업일 것 같아요
- DIMA Master Class 봉준호 감독편
나는 영화의 메세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웃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감정을 공유하고, 이해를 돕는 것을 영화의 주요 목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마치 나의 영화에 대한 생각을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두 감독에게 전면으로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도 부정했다. '감독은 카메라로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닌가', '영화에서 메세지나 선동을 아예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혼자 무형의 존재와 쉐도우 복싱을 하다가 문득 박찬욱 감독의 말을 다시 보게 됐다. '히치콕적인 의미에서의 순수한 영화', 이게 뭐지? 순수한 영화가 뭐지? 메세지가 없으면 순수한 영화인가? 호기심이 생겨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창>, 알프레드 히치콕, 1954(하단 발번역 주의)
순수 영화 (Pure Cinema)라는 매체가 바로 내가 믿는 것입니다. 공포를 만들기 위해 영화 조각을 모으는 것이 제가 하는 일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 MONITOR: HUW WHELDON MEETS ALFRED HITCHCOCK (1964)
트뤼포: 당신은 제임스 스튜어트의 땀에 젖은 얼굴로 문을 엽니다. 당신은 깁스를 한 그의 다리로 이동한 다음, 근처 테이블에는 고장 난 카메라와 잡지 더미가 있고, 벽에는 트랙에서 넘어지는 경주용 자동차의 사진이 있습니다. 그 한 번의 오프닝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의 작업에 대한 모든 것, 심지어 그것이 어떻게 그의 사고를 일으켰는지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히치콕: 그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연결하기 위해 영화적인 (cinematic) 수단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스튜어트에게 '어떻게 다리가 부러졌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습니다. 스튜어트가 대답합니다. '자동차 경주 사진을 찍고 있을 때 과속 차량 중 한 대의 바퀴가 떨어져 나에게 박살 났습니다.' 이건 평균적인 장면이 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시나리오 작가가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큰 죄 중 하나는 대사 한 줄로 그 문제를 덮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화는 단순히 여러 소리들 중 또 하나의 소리에 불과하며, 눈으로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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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 요즘 만들어지는 영화 중에는 시네마 (cinema)가 거의 없습니다. 그 영화들은 대부분 내가 '대화하는 사람들의 사진첩'이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스토리를 전할 때, 대사는 다른 식으로는 불가능할 때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항상 스토리를 먼저 영화적 방법으로, 숏과 숏의 연결을 통해 풀어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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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 나는 주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또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도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영상이나 음향, 그리고 순수하게 기술적인 요소들이 관객이 비명을 지르도록 만드는데 대해서는 관심을 가집니다. 영화적인 기법을 이용해 어떤 대중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수 없이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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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 이미지의 크기는 감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 hitchcock/Truffaut, 프랑수아 트뤼포, 1966
히치콕이 정의하는 순수 영화에서 인물의 대사, 연기, 영화의 주제, 메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렇게 집착하여 눈여겨보고 읽고 해석하려는 영화의 모든 것들은 사실 순수 영화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부수적인 것들일 뿐이었다. 순수 영화는 오로지 영상이나 음향을 통해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고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데 관심을 가진다.
생각해 보면 영화의 텍스트에 집착하는 나의 성향은 조금 이상하다. 영화의 이야기 요소, 텍스트를 읽어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사실 영화를 볼게 아니라 책을 읽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책을 거의 읽지 않고 영화만 본다. 분명 처음 영화를 볼 때에는 영화의 이미지에 매료됐었는데, 언제부턴가 이해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미지는 외면한 채 텍스트만 읽으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헤어질 결심의 이미지는 어떤 감정을, 정서를 불러일으킬까. 바로 떠오른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대비/대조되는 이미지. 영화에서는 청록색과 붉은색, 두 색상이 대비된다. 청록색은 해준과 서래의 (산과 바다의) 사랑, 안정, 안전을, 반대로 붉은색은 폭력, 죽음, 살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두 색상의 속성은 얼핏 절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은,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래가 두 가지 색상의 옷을 같이 입듯이, 영화에서 이 둘은 공존한다. 해준의 직업은 경찰이다. 경찰은 직업 특성상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계속해서 폭력과 살인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해준의 아내 정안은 원전 안전 관리사이다. 경찰과 유사하게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원전을 안전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렇듯 안정적인 해준은 환경에 둘러싸여 안전을 수호해 나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폭력과 살인을 열망한다. 그리고 그 열망은 폭력과 살인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서래에게 향한다. 그런 세계에서 살아온 서래는 반대로 해준의 감시로부터 안정감을 느낀다. 붉은색과 청록색, 반대되는 것만 같은 두 색상은 한데 뒤엉켜 새로운 사랑의 속성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시차이다. 영화에는 시차를 두고 무언가를 따라 하는 행위, 지연되는 이미지가 수도 없이 반복된다. 번역앱, 위치 추적, 타이밍이 어긋나는 문자, 녹음과 재생. 이미 벌어진 사건을 역추적해서 쫓아가는 수사라는 행위 역시 본질적으로 시차를 둔 모방 행위와 같다. 숏과 숏 간의 연결되는 트랜지션 역시 이전의 숏이 다음 숏을 쫓아가려다 끝내 흐려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시차를 둔 모방, 지연의 이미지는 결국 사랑으로 이어진다. 서래가 해준을 따라 테이블을 닦는다. 해준이 서래를 따라 숨을 맞춘다. 해준이 서래와 똑같이 월요일 할머니의 집 창문을 넘어 산을 오른다. 해준과 서래가 번갈아 북을 두드린다. 서래가 해준을 쫓아 이포로 간다. 해준도 서래를 쫓아 구소산으로 간다. 그리고 둘의 사랑은 시차를 두고 결국 어긋난다. 해준의 사랑이 끝났을 때 서래의 사랑이 시작됐다. 해준은 서래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런 이미지들은 마침내 나에게도 와닿는 것 같다. 내가 사랑했지만 함께 할 수 없기에 애써 외면하고 무시했던 나의 속성, 그리고 사랑하는 다른 누군가, 어떤 것들. 그리고 내가 시차를 두고 놓친 것들, 따라 하려다 실패한 그 모든 것들이 떠오른다. 죽을 만큼 사랑한 사람의 마음에 자신을 미결 상태로 봉인한 서래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발 밑에 두고도 허우적댈 수밖에 없는 해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로 와 해석되어 재현된 모든 것들. 모두에게 슬픔과 아픔을 느낀다.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내가 읽은 수많은 헤어질 결심 관련 글들 중 가장 맘에 들었던 문구 하나를 적고 마무리하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영원히 미제사건으로 남기 위해
그를 붕괴시켰던 것들을 바로잡아 놓고
'말씀'으로 남은 사랑의 증거 하나만 남긴 채
깊은 곳에 빠져 아무도 찾지 못하게 하는 매뉴얼, 아니 정해진 순서
... 라고 하면 쉬워요?
더 쉽게.
- 부기영화 161화. 헤어질 결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