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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현 Nov 21. 2023

성에서 시작되는 비극

영화 <데드 링거>에 대하여

스포주의

You've heard about sex?


영화 <데드 링거>는 오프닝 크레딧이 끝난 후 암전된 화면이 채 켜지기도 전에 대뜸 이런 질문부터 던진다 "성관계가 뭔지 알아?". 영화의 세계로 초대하는 첫 음성이 이런 당돌한 질문이다 보니 상당한 주목을 이끔과 동시에 (그래서 이 글에서도 한 번 활용해 봤다) 성관계가 이 영화의 대단히 주요한 키워드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첫 문장을 들음과 동시에 성관계가 아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보는 어린 학생이 성별을 묻는 sex 란을 성관계 여부로 오해하여 X를 기입했다는 귀여운 썰이다. 나는 저 문장을 듣자마자 '성관계가 아니라 성별인데 잘못 번역한 거 아닐까?'라는 생각부터 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오역이 아닌 단순한 내 착각이었다. 문맥상 성별이 아닌 성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보는 영화마다 족족 젠더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스스로의 경향성에 의아함을 느끼며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그런데 영화는 끝까지 성관계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젠더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들렸다. 적어도 첫 시작의 sex를 제멋대로 성별로 해석한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문맥적으로 성관계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던 첫 문장의 sex는 사실 성별에 대한 이야기였을까? 아니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최근의 경향성이 영화에 대한 해석을 헤친 것일까?


일란성쌍둥이 앨리엇 맨틀과 베벌리 맨틀은 외형적으로는 구분할 수 없으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둘은 산부인과 의사라는 직업부터 사는 곳과 사생활까지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이이다. 어느 날 유명 배우 클레어 니보의 진찰을 맡게 되면서 완벽히 동기화되어 있던 쌍둥이의 삶에 급격한 변화가 시작된다.



성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던 강렬한 도입부와는 달리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성관계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맨틀 형제의 전공은 산부인과이지만 왜 산부인과를 선택했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클레어의 자궁 경부가 세 갈래로 나뉘어있는 것을 보고 경탄하지만 이 역시 성관계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다. 심지어 클레어와의 성관계 장면까지 나오지만 이 역시 성관계 자체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도리어 성관계를 포함해 지금까지의 장면들은 현대사회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는 것 같다. 여기서의 불안과 공포는 맨틀 형제와 클레어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자아와 타자에 대한 불신이다. 내가 알고 있는 나, 상대방이 진짜로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는가에 대한 불안과 여기서 비롯되는 공포이다.


그렇다면 <데드 링거>에서의 성관계는 자아, 타자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는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걸까? 성기의 접촉이 반드시 이뤄지는 성관계를 통해 불안과 공포를 드러내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단히 효율적인 선택이다. 신체적 치부를 드러낸 자신 혹은 타인이 사실 내가 아는 사람과 다르다는 것만큼 두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관계는 충분히 불안과 공포를 표현하는 데 있어 기능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대사에서 sex의 의미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한다. 이 순간 sex는 불안과 공포를 초래하는 성관계라는 탈을 벗고 성별 혹은 젠더라는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베벌리는 여자 이름이잖아요" 클레어는 별 뜻 없이 질문한다. 이에 "우리가 동성애자라고요?", "엄마가 딸을 원하신 거라고요?"라고 되물으며 격분한다. 클레어는 당황하며 조현병 환자 같다고 말한다. 여기서 클레어가 조현병 같다고 말한 부분은 쌍둥이임을 인지하지 못해 발생하는 성격에 대한 오해이다. 하지만 성격이 완전히 다른 쌍둥이임을 이미 알고 있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다른 부분이 의아하다. 왜 굳이 저 말에 저렇게까지 화를 낼까? 베벌리가 여성적인 이름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했다거나 하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나? 어머니가 딸을 원했다며 베벌리를 거부한 경험이 있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여성적인 '이름'이 아니다. '여성적인' 이름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잘못된 가정을 한 가지 해보자. 영화 스토리상에서는 이 가정이 적용될 수 없다. 오로지 영화의 텍스트를 읽어내기 위해 이 글 내에서만 적용되는 억지 가정이다. 맨틀 형제는 애초에 없다. 앨리엇 혹은 베벌리 맨틀만 있을 뿐이다. 앨리엇 맨틀이라는 라벨이 붙은 주체는 젊고 잘 나가는 산부인과 의사이다. 학부생 때부터 수술용 기구를 만들 정도로 뛰어나며 젊은 나이에 대학교 부교수 자리까지 올라갔다. 대외적인 자리에서 뛰어난 스피치 능력으로 청중을 사로잡는다. 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 심지어 성관계에서까지도 상대를 기쁘게 하고 거기서 우위를 점한다. 앨리엇 멘틀에 대한 대외적인 평가는 완벽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면모도 가지고 있다. 대외적인 자리에 잘 나서려고 하지 않으며 타인을 대할 때도 대단히 조심스럽다. 힘들고 지루한 연구 데이터 수집도 해내지만, 거기서 발생한 성과로 인한 스포트라이트는 피하려 한다. 전형적인 남성적 엘리트인 앨리엇은 다분히 여성적인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이 역시 자신이기 때문에 제거할 수도 없다. 그래서 베벌리라는 여성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주체를 만들어 자신의 여성적인 모습을 모조리 부여함으로써 자아를 이원화한다.


줄리엣 크리스테바


이와 같은 자아분열은 '공포영화에서의 비체화(abjection)', 그리고 '섹스와 젠더' 두 가지 개념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비체(abject)란 주체(subject)도 대상(object)도 아닌 존재이다. 주체는 인식할 수 없는 존재,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인 비체를 마주할 때 공포를 느끼게 된다. 주체는 실존을 위해 무언가를 비체로 규정하면서 주체를 형성해 나간다. 이는 주체가 상징계의 논리에 순응하기 위해 사회에서 정상이라고 호명되는 질서, 깨끗한 몸 등의 기준과 분리되는 비체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주체를 구성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줄리엣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이러한 비체화는 공포영화로 확장되어 적용된다. 공포영화 해석의 틀을 제시하는 비체화(abjection)는 중심, 주류를 형성하는 주체가 정체성을 확보하고 보존하기 위해 이질적이며 경계를 침범하는 대상을 중심으로부터 밀어내는 활동이다. 이와 같이 비체화는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주체의 저항이기도 하다. 주체의 거부 반응은 비체를 생산하지만 지속된 비체의 증가는 결국 또 다른 주체의 탄생을 의미한다 (박건용, <공포영화에서 재현된 가족상의 희생제의 르상티망에 관한 연구>, 2020).


시몬 드 보부아르


젠더는 생물학적 성(‘섹스’)과 구별되는, 사회적/문화적으로 인식되는 성을 가리킨다. 프랑스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1949)에 나오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진술은 생물학적 성인 섹스와 젠더를 구별하는 이론적 토대가 됐다. 앞서 성별이라고 얘기했던 베벌리의 생물학적 성, 즉 섹스는 남성이다. 하지만, 사회적/문화적으로 인식되는 젠더는 여성이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재현되는 보편적 정서에서 남자는 성취하고 창조하고 정복하려고 할 때 자신의 진가를 가장 잘 발휘하도록 되어 있는 반면, 여자는 감정의 소용돌이, 즉 남자나 자녀에 대한 사랑에 휩싸일 때 가장 자신다워지기 때문이다.


두 개념을 종합하여 <데드 링거>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앨리엇 맨틀이라는 주체는 사회적 정상성과 거리가 먼 섹스와 젠더 간의 괴리에 혼란을 느낀다. 앨리엇은 정체성을 확보하고 보존하기 위해 내면의 여성성을 비체화한다. 즉, 사회의 논리와 질서에 순응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 일부를 존재하지만 인식할 수 없는 무언가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비체의 지속적인 증가는 결국 또 다른 주체인 베벌리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앨리엇과 베벌리는 다른 주체이지만 모든 것을 공유한다. 분명 한 명은 시상식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한다. "내가 경험하지 않으면 넌 경험한 게 아니야"라고도 말한다. 애초에 두 주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둘은 하나이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치 하나인 것처럼 모든 것을 함께 경험하고 공유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본래 하나였던 두 주체, 특히 주체로부터 비체로 떨어져 나와 또 다른 주체가 된 베벌리는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앨리엇과 신체를 공유하는 샴쌍둥이가 되는 악몽을 꾸기도 하고 약물에 중독되기까지도 한다. 이렇게 불안정해져 가는 맨틀 형제 사가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는 클레어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베벌리는 클레어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다. 클레어는 우선 생물학적 여성이다. 그리고 여러 개의 자아를 연기하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사회적 정상성에 더 알맞다고 여겨지는 앨리엇이 아닌 베벌리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런 앨리엇 역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베벌리는 앨리엇까지 받아들이려고 한다. 클레어가 쌍둥이 모두를 받아들이려 하자 베벌리는 되려 클레어가 자신과 앨리엇의 육체적 연결을 끊어내는 꿈을 꾼다. 기존에 이원화되어 있던 맨틀 형제 사가가 무너지고 있다는 두려움과 동시에 비체로서 부유하는 삶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욕망이 모두 악몽에 투영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클레어는 3개의 자궁 경부를 가지고 있다.



맨틀 형제는 자궁을 포함한 여성기에 대단히 집착한다. 산부인과 전공을 택했으며 학부생 때 자궁을 직접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술 기구를 개발했다. 진료를 통해 다양한 여성기를 접하며 경탄하기도, 혐오하기도 한다. 이러한 집착은 사회와 자아로부터 거부된 앨리엇의 젠더로부터 파생된다. 먼저, 여성기는 섹스로써의 여성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거기에 자신의 비정상성을 투영하여 사회적 정상 범주에 조금이라도 벗어난 여성기를 마주했을 때 이를 돌연변이 등으로 격하하고 끔찍하게 여긴다. 게다가 자신의 섹스가 잘못되었다, 즉 잘못 태어났다여기는 의식은 자궁과 임신에 대한 집착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들은 한데 뒤섞여 클레어의 자궁을 통해 어떤 이상적인 형상으로 투영된다. 그것은 3개의 자궁 경부, 그리고 거기에 잉태된 3명이 아기들이다. 양쪽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분리된 맨틀 형제가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이 둘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클레어가 있는 것이다. 맨틀 형제는 이러한 형상을 앨리엇의 연인인 캐리를 통해 재현하려 한다. 하지만 실패하고 베벌리는 기절하고 만다. 이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클레어와 다르게 캐리는 오로지 앨리엇만을 원하며 앨리엇에게 베벌리와 인연을 끊을 것을 종용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맨틀 형제에 여성기에 대한 집착은 수술 장면과 직접 제작한 도구에서도 드러난다. 베벌리는 예술가 월렉을 통해 새로운 수술 기구를 개발한다. 하지만 이 새로운 기구는 학부생 때 만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도저히 수술에 사용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이렇게 새롭게 만든 기구를 들고 들어간 수술실 역시 일반적인 수술실과는 전혀 다른 새빨간 광경으로 묘사되고 있다. 베벌리에게 있어 이 수술은 수술이 아닌 의식에 가깝다. 환자의 아픈 부분을 치료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욕망하고 동시에 혐오하는 여성기를 정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새로운 여성기로 교체하는 의식이다. 즉, 수술 기구는 인공 장기이며 수술은 비정상성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신성한 의식인 것이다.


결국 베벌리는 클레어가 없는 단 10주라는 짧은 기간만에 약물에 중독되어 완전히 망가지고 만다. 비정상적인 의료 행위로 산부인과 의사 직업까지 잃을 위기에 처한다. 클레어가 돌아오고 베벌리의 붕괴는 회복되는 듯했으나 사실 앨리엇에게 전이된 것이었다. 베벌리와 앨리엇은 분리된 주체이나 애초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결국 맨틀 형제는 망가져버린 한쪽 주체를 없애고 다시 하나가 되기로 결심한다.  중요한 것은 직업도, 사회적 지위나 명예도 아닌 존재를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따라서 맨틀 형제는 그 사랑의 종착점인 클레어가 사랑하는 베벌리가 되기로 한다. 베벌리는 앨리엇의 배를 가르고 거기에 인공 여성기를 삽입한다. 섹스와 젠더의 괴리를 없애고 온전히 하나의 자신으로 클레어를 마주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앨리엇은 자신이 만든 모든 기구를 가지고 오지 못했다. 결국 수술은 실패로 끝난다. 앨리엇은 죽고 불완전한 상태의 반쪽짜리 베벌리만 남아있다. 베벌리는 클레어를 만날 수 없다. 베벌리는 끝내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 글의 시작점이자 영화의 시작점이기도 한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맨틀 형제는 섹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은 물고기의 성관계, 즉 여성기가 없어도 임신을 할 수 있는 성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이를 시도해보고 싶어 한다. 형제는 치마를 입은 또래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욕조에서의 성관계(sex)를 제안한다. 그녀는 격렬히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성관계가 뭔지도 잘 모르는 자식들이! (Besides, You don't even know what fuck is!)". 이들의 비극은 성에 대해 잘 몰라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성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이들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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