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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은 이름표보다 앞선다, 사르트르와 정보 접근성

by 김경훈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두 갈래로 나눈다.

하나는 ‘앉는 것’이라는 본질을 위해 태어난 의자처럼, 정해진 목적이 존재에 앞서는 존재이다.

다른 하나는 정해진 본질이나 목적 없이 그저 세상에 내던져진 후,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야 하는 존재, 곧 실존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바로 이 두 번째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삶을 통해 그 본질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는 끊임없이 인간에게 ‘의자’가 되라고 강요한다.

국가와 사회, 학교와 가정은 ‘국민’ ‘학생’ ‘아들’ ‘회사원’과 같은 이름표를 붙이며, 그 이름이 곧 당신이라고 말한다.

특히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사회는 더욱 강력한 이름표를 내민다.

‘장애인’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때때로 삶 전체를 덮어버리는 낙인이 된다.


한 시각장애인 연구자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그는 학회에 참석해 자신의 연구를 발표하고 동료 연구자들과 깊이 있는 논의를 이어간다.

그러나 청중의 일부는 질문을 연구의 내용이 아니라 연구자의 ‘상태’로 돌린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연구하시나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 말들은 겉으로는 칭찬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시각장애인’이라는 이름표를 본질로 삼고 그 본질 안에서만 상대를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그는 연구자이기 이전에 시각장애인으로 먼저 규정된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시각장애인’이라는 본질이 먼저 있고, 그 뒤에 ‘연구자’라는 역할이 따라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연구하고 사유하는 한 인간’이라는 실존이 먼저 있다.

그리고 시각장애는 그가 가진 수많은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러한 실존주의의 선언은 단순한 철학적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해진 본질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의하겠다는 고독한 의지의 표명이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고 말했듯, 실존적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세상이 씌우는 모든 이름표를 떼어내고, 나는 그저 지금 여기에 있다

이 단순하지만 단호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 투쟁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장애와 같은 사회적 낙인이 여전히 견고하게 작동하는 세계에서 실존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은 때때로 외롭고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여정은 더욱 의미 있다.


실존주의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이름은 당신이 만든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대신 정해준 것인가


정보학을 연구하는 이의 입장에서 실존주의는 기술 개발의 근본적인 방향을 되묻게 한다.

기술이 인간을 규정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더 자유롭고 더 구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장애인 사용자’라는 범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한 사람’을 위한 기술이어야 한다.


결국 실존주의는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으로 삶을 재정의하라고 요구한다.

‘장애인’이라는 이름표 뒤에 가려진, 연구하고 사랑하며 때로는 실패하는 한 명의 구체적인 인간.

그 실존의 가능성을 끝까지 긍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억압적 본질에 맞서는 가장 조용하고도 위대한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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