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청구서 돌려막기.

포용이라는 이름의 우아한 폭력

by 김경훈

따뜻한 단어가 숨기고 있는 차가운 민낯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포용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익숙하고 안전하다.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가자는 이 따뜻한 제안에 반대하기란 쉽지 않다.

본래 포용은 제이차 세계대전 이후 인권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며 등장한 진보적인 언어였다.

장애인을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이끌어내고, 분리 교육을 통합 교육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기존 사회의 기준을 흔들기 위해 사용된 치열한 단어였다.

하지만 이천년대 이후 포용은 국가 정책과 문서에 도배되며 그 성격을 교묘하게 바꾸었다.

권리라는 무겁고 책임감 있는 단어를 대체하는 우아한 알리바이가 된 것이다.



[감각사진]

관공서 로비에 덩그러니 놓인 터치스크린 키오스크 앞에 안내견 탱고와 함께 멈춰 섰을 때의 감각을 떠올려 본다.

매끄럽고 차가운 유리 표면을 손끝으로 더듬어 보지만, 점자도 음성 지원도 없는 텅 빈 평면은 어떠한 정보도 내어주지 않는다.

뒤통수를 찌르는 사람들의 조급한 시선이 느껴질 때, 턱끝까지 차오르는 무력감과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의 서늘한 온도 말이다.

누군가는 우리 사회가 포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며 위로를 건네겠지만, 내 손끝에 닿는 현실의 장벽은 그 어떤 따뜻한 말로도 녹일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차갑다.



권리는 청구서이고 포용은 부도 수표다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국가가 법적 의무를 지고 예산을 투입하며 실패 시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시민은 해 달라고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한다고 청구할 수 있다.

반면 포용은 다르다.

포용에는 명확한 기준도 책임도 없다.

국가는 노력하고 있다거나 점진적으로 개선하겠다는 말로 책임을 부드럽게 유예한다.

예산 배분과 우선순위를 둘러싼 치열한 정치적 갈등은 어느새 개인의 공감 부족이나 태도의 문제로 둔갑한다.

장애가 있는 나는 이 과정을 몸으로 겪어왔다.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면 예민하고 과격한 사람이 되고, 국가는 착하고 자애로운 포용의 주체가 된다.

나는 졸지에 고마워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포용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국가는 이미지 관리를 위해 포용을 즐겨 쓴다.

장기적으로, 혹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지연의 언어 뒤에서 그 비용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으로 남는다.

포용하는 자와 포용되는 자가 나뉘는 순간 이미 평등은 깨진 것이다.

우리가 상상해야 할 사회는 누군가의 넉넉한 마음으로 포용을 베푸는 사회가 아니라, 애초에 배제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사회다.

장애인은 포용의 대상이 아니라 정책의 출발점이자 권리의 주체여야 한다.

인간을 그저 인간으로 대하는 사회, 굳이 포용이라는 거창하고 시혜적인 단어를 입에 올릴 필요조차 없는 그 당연한 사회를 우리는 청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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