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인류 문명의 불균형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왜 어떤 민족은 다른 민족을 지배했고, 어떤 사회는 세계 질서를 주도하게 되었는가.
그가 내린 대답은 인종도 문화도 아닌 ‘환경결정론’이라는 단 하나의 축에 집중된다.
결국 모든 것은 운이었다.
어느 대륙에서, 어떤 생태 조건 아래 태어났느냐가 문명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서사는, 시각장애인으로서 정보학을 연구하는 나의 삶에 기이할 만큼 정확한 유비를 제공한다.
가령, 동일한 지적 능력을 가진 두 명의 시각장애인 학생을 상상해 보자.
한 명은 정보 접근성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나라에서 성장했고,
다른 한 명은 접근성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자라났다.
첫 번째 학생은 마치 유라시아 대륙의 혜택을 입은 사람과 같다.
그는 화면낭독기, 점자정보단말기, 보조공학기기와 같은 기술이라는 ‘쇠’를 갖고 있다.
장애인 차별금지법이나 교육기본법은 그를 둘러싼 제도적 ‘균’의 역할을 하며
외부의 불리한 환경으로부터 면역체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모든 기반 위에서 그는 자신의 사고력과 창의성을 ‘총’처럼 정밀하게 연마할 수 있다.
반면 두 번째 학생은 농작물도, 가축도, 철기 문명도 없었던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과 흡사하다.
정보에 접근할 수단은커녕, 질문을 던질 만한 환경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가 날마다 감당해야 하는 정보의 수렵과 채집은
단지 교과서를 읽고 수업을 듣기 위한 기본적 조건조차 자급자족해야 하는 처절한 생존의 일상이다.
그의 지적 잠재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의 환경이, 축적과 분배의 구조를 가능케 할 최소한의 기반조차 제공하지 않을 뿐이다.
『총 균 쇠』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류의 역사적 불균형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구조적 불평등을 해석할 수 있는 도식이자 지도이다.
한 사람이 박사과정에 진학해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이유가 과연 그 사람의 의지 때문이기만 한가.
오히려 그것은 화면낭독 기술, 접근 가능한 문헌 구조, 차별을 금지하는 제도라는 다층적 지원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경결정론은 운명론이 아니다.
다이아몬드의 책이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불평등의 기원을 지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불평등이 어떻게 복제되었는지를 추적하면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인류의 개입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환경이 결정했다면, 우리는 그 환경을 개입 가능성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정보학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개입 가능성을 실천하는 작업을 수행 중이다.
유니버설 디자인과 정보접근성이라는 기술적 토대는, 더 이상 일부 선진국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유라시아 대륙의 작물이 전파되듯.
보편 설계의 원칙과 보조 기술의 표준은 전 세계 모든 대륙과 지역에 확산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 수출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에 관한 가치 수출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총 균 쇠』 이후 우리가 읽어내야 할 다음 문장이다.
인간의 잠재력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분포되어 있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보 접근성에 대한 연구는 한 개인의 자율을 넘어선다.
그것은 운명론에 맞서는 구조 개입이며
환경결정의 우연성을 기술과 제도로 재구성하려는 역사적 실천이다.
오늘 내가 연구실에 앉아 스크린 리더로 논문을 읽을 수 있는 것.
그것은 내 능력 이전에 내가 받은 세계의 배치이자, 앞으로 내가 다른 이들을 위해 다시 재배치해야 할 세계의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