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이 아이는 어떡하죠?"
이것은 발달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모든 부모가 마음속에 품고 사는 가장 무겁고 시린 질문이다.
부모의 노화와 죽음은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지만, 그 자연스러운 끝맺음이 남겨진 아이에게는 세계의 멸망을 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발달장애인의 노후 준비는 철저히 가족의 희생과 몇몇 실무자의 헌신이라는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왔다.
하지만 기억에 의존하고 개인의 체력에 기대는 돌봄은 필연적으로 끊어지기 마련이다.
돌봄이 끊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결국 '기록'과 '데이터'의 문제다.
한 사람의 삶을 데이터로 구축하여, 누가 돌보든 그 연속성을 이어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이것은 자신의 죽음 이후를 준비하며 두꺼운 노트에 아들의 일상을 빼곡히 적어나가던 한 늙은 아버지를 만나, 그 낡은 노트를 '영구적인 데이터'로 변환하는 아키텍처를 구상하게 된 기록이다.
낡은 대학 노트
대구에 위치한 '해바라기 주간보호센터'.
김경훈은 발달장애인 정보 접근성 개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곳을 방문했다.
센터 한구석에서 보보와 함께 자료를 정리하던 중,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다가왔다.
서른다섯 살의 중증 자폐성 장애인 지훈 씨의 아버지, 일흔 살의 박영철 어르신이었다.
"김 박사님이라고 하셨지요. 내가 며칠 전부터 박사님 오시는 날만 기다렸습니다."
박 어르신은 품에서 모서리가 다 해진 두꺼운 대학 노트 세 권을 꺼냈다.
"이게 뭔가요, 어르신?" 김경훈이 물었다.
"우리 지훈이 사용설명서입니다." 어르신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내가 요새 심장이 안 좋아서 언제 갈지 모르거든요. 지훈이 애미는 일찍 떠났고... 내가 죽으면 우리 애는 시설로 가야 할 텐데, 거기 사람들이 우리 애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썼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을 미지근하게 줘야 하고, 화가 나면 오른쪽 귀를 만져줘야 진정하고, 된장찌개에는 두부를 꼭 작게 썰어 넣어야 먹는다는 거... 십 년 넘게 적었는데, 글씨가 삐뚤빼뚤해서 남들이 알아볼까 무섭네요."
보보가 노트를 넘겨보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어르신, 지훈 씨가 좋아하는 색깔, 싫어하는 냄새, 배변 습관까지 다 적혀 있네요. 정말 백과사전이에요."
"근데 이 노트가 불에 타거나 잃어버리면 끝이잖아요. 박사님은 컴퓨터 잘하시니까, 이거 안 없어지게 어디 기계에 좀 넣어주면 안 됩니까?"
가족의 책임에서 시스템의 기억으로
김경훈은 하네스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 두꺼운 노트 세 권의 무게가 곧 한 아버지의 절박함이었다.
"어르신." 김경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모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질문은 가족의 오랜 불안이죠. 지훈 씨의 미래가 불안한 건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라, 이 노트에 적힌 방대한 정보와 자원이 오직 어르신의 머릿속과 이 낡은 종이에만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소 정보 리터러시를 연구하며 찾아보았던 해외 사례들을 떠올렸다.
"미국에는 '더 아크(The Arc)'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거기서 '빌드 유어 플랜(Build Your Plan)'이라는 온라인 미래 설계 도구를 운영하죠. 어르신이 노트에 적으신 지훈 씨의 일상, 선호도, 건강, 의사결정 방식 같은 걸 온라인에 차곡차곡 기록하는 겁니다. 종이 노트는 타지만, 데이터는 영원하니까요."
박 어르신의 숨소리가 커졌다. "그런 게 있습니까?"
"네. 중요한 건 이 기술이 무슨 인공지능이 알아서 밥을 먹여주는 화려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당사자의 삶을 기록하고, 가족의 걱정을 계획으로 바꿔서, 어르신이 안 계셔도 지훈 씨를 맡을 지원자들이 언제든 접속해서 일관된 돌봄을 유지할 수 있게 돕는 도구죠. 돌봄이 끊기지 않는 '정보의 다리'를 놓는 겁니다."
데이터가 드러내는 지역사회의 빈틈
"그뿐만이 아니에요, 어르신." 보보가 옆에서 거들었다.
"호주에는 '케어 섹터 디맨드 맵'이라는 게 있대요. 지도에다가 어느 동네에 발달장애인이 몇 명 살고, 그 동네에 돌봄 시설이나 낮 활동 프로그램이 얼마나 있는지 띄워주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정부가 '아, 이 동네는 시설이 부족하구나' 하고 알고 지원을 해줄 수 있잖아요."
김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발달장애인의 노후 준비는 개인이나 가족이 아무리 노트를 쓰고 애써도, 지역사회 안에 주거와 돌봄 인프라가 없으면 완성될 수 없습니다. 결국 한 사람의 미래 설계만큼 중요한 건, 지역사회의 준비 상태를 데이터로 드러내서 정부가 움직이게 만드는 일이죠."
박 어르신은 멍하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나라에는... 왜 아직 그런 게 없습니까. 나 죽기 전에 지훈이 정보라도 좀 컴퓨터에 넣어놓고 싶은데."
"그래서 제가 오늘 이 노트를 빌려 가겠습니다." 김경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걸요?"
"네. 제가 직접 스캔하고 텍스트로 변환해서, 지훈 씨만의 작은 '온라인 사용설명서'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걸 시작으로, 우리 시청 공무원들한테 가서 보여줄 겁니다. 개인의 노트를 사회의 데이터베이스로 바꾸는 인프라를 구축하라고요. 이건 지훈 씨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기술은 돌봄을 대신할 수 없지만
박 어르신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발치에 있던 탱고가 꼬리를 흔들며 어르신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박사님... 고맙습니다. 내가 이 짐을 내려놓을 데가 없어서 매일 밤 숨이 막혔는데... 고맙습니다."
"어르신." 김경훈이 부드럽게 말했다.
"미국의 맵 오브 라이프 같은 도구들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노후 준비를 몇 번 해줬냐는 숫자 놀음이 아니라, 당사자가 실제로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 삶의 질을 분석하기 때문입니다. 지훈 씨의 기록이 쌓이고 쌓이면, 그 데이터가 지훈 씨의 내일과 노후를 지탱하는 가장 튼튼한 요새가 될 겁니다."
김경훈은 박 영철 어르신의 주름진 손을 꼭 잡았다.
"기술이 사람이 하는 돌봄 자체를 완벽하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돌봄을 가능하게 할 '준비'는 할 수 있죠. 지훈 씨는 굶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제목: 돌봄의 아키텍처, 혹은 영원한 노트.
발달장애인의 노후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재난이 아니라, 이미 예견된 현실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무거운 짐을 오직 가족의 피눈물에만 맡겨왔다.
하지만 한 인간의 삶은 개인의 헌신만으로 끝까지 지켜낼 수 없다.
박 어르신의 낡은 노트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슬픔이다.
이 슬픔을 영구적인 데이터로 변환하고, 지역사회의 서비스 공백을 지도로 그려내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가 구축해야 할 가장 시급한 '정보 인프라'다.
결론: 기술은 사람을 껴안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을 껴안는 법을 다음 사람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는 있다.
> 그나저나 지훈 씨 사용설명서 중에 '된장찌개에는 두부를 작게'라는 항목이 왠지 남 일 같지 않다. 나도 결혼하면 보보에게 내 사용설명서 데이터를 확실히 입력해 둬야겠다. (잔소리 1절만 하기, 탱고 간식 몰래 주지 않기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