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의 유통기한을 수호하는 법

by 김경훈

연구자에게 원두는 단순한 식료품이 아니라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도록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데이터 저장소’와 같다.

귀하게 공수한 원두를 허투루 방치하는 것은 공들여 수집한 연구 자료를 백업 없이 방치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다.

커피 보관에 대단히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야말로 맛의 본질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내가 선택한 보관의 대원칙은 '유리'와 '밀폐'다.

많은 이들이 간편하게 플라스틱 용기를 사용하지만, 나는 가급적 유리 용기를 고집한다.

플라스틱은 미세한 틈 사이로 커피 특유의 기름기와 향이 배어들기 마련이다.

여러 종류의 원두를 번갈아 가며 맛보는 즐거움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이전 원두의 잔향이 다음 원두의 프로파일을 오염시키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유리는 향이 배지 않아 세척만 꼼꼼히 한다면 언제든 새로운 원두를 온전한 상태로 맞이할 준비가 된다.


유리 벽 너머로 비치는 원두의 정물화.

투명한 유리병 속에 원두를 담아두면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 표본처럼 보인다.

용기 입구를 열 때 들리는 '폭' 하는 기분 좋은 마찰음은 밀폐가 완벽했다는 증거다.

손가락으로 유리 벽을 톡톡 두드리면 안쪽에서 원두들이 '자그르르'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코를 가까이 대면 용기 안에 갇혀 있던 농축된 아로마가 단숨에 터져 나오며 후각을 마비시킨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원두 표면의 오일 질감과 묵직한 갈색의 농도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충만하게 한다.


보관의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나만의 요령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커피 봉지째 유리 용기에 통째로 집어넣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용기 내부에 원두 가루가 직접 닿지 않아 세척이 훨씬 수월하고, 다음 원두로 교체할 때도 간편하다.

이때 가장 주의 깊게 확인하는 절차는 용기의 밀폐 상태다.

시중에는 밀폐 용기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공기가 야금야금 스며드는 부실한 제품들이 섞여 있다.

공기라는 변수는 원두를 빠르게 산패시키는 주범이기에, 뚜껑을 닫을 때 손끝에 전해지는 압력과 저항감을 꼼꼼히 체크한다.


결국 보관이란 향기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잠시 멈추는 행위다.

연구실 한쪽에 나란히 줄 서 있는 유리병들은 각기 다른 대륙과 숲의 이야기를 품은 채 내가 호출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철저히 밀폐된 공간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이 원두들이 있기에, 나의 밤은 언제나 신선한 각성으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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