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의 지겨운 특별함
매년 4월이 되면 나는 갑자기 국가 공인 주인공이 된다.
스크린리더는 각종 기관에서 보내온 행사 안내 메일을 속사포 래핑처럼 읊어대고, 탱고의 가죽 하네스를 잡고 걷는 나의 뒷모습에는 평소보다 2배는 더 끈적한 동정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이것은 일종의 ‘시즌 한정 메타데이터’의 폭주다.
평소에는 나라는 데이터를 시스템 구석에 방치하던 사람들이, 4월만 되면 나를 ‘특별한 이야기’라는 서가에서 꺼내어 먼지를 턴다.
나는 이러한 노출이 확대되는 것 자체를 시스템 오류라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장애가 더 흔해져서,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지루한 일상이 되기를 바란다.
더 이상 특별한 이야기로 소비되지 않는 시대가 오기를 희망한다.
다만 그 모습들이 특정 시기에만 집중되어 반복될 때, 나의 삶은 일상의 일부가 아니라 ‘일 년에 한 번 호출되는 샘플 데이터’로 남게 된다.
되짚어보면 매년 이 시기가 되면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각종 행사와 기념식이 줄을 잇는다.
연구실에 앉아 있는 나에게도 여러 기관으로부터 안내가 쏟아진다.
‘장애인의 날’은 인식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 취지는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특정한 날에만 장애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장애를 일상과 분리된 별도의 아카이브로 남겨둔다.
장애를 특정한 날에만 드러내려 할수록 오히려 사회적 경계는 더 선명해진다.
한편에서는 이러한 날이라도 있어야 그나마 장애인의 삶을 드러낼 기회가 생긴다고 말한다.
일상 속에서 충분히 보이지 않는 현실을 고려하면,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는 시도 역시 필요하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묻고 싶다.
그 기회가 특정한 날에만 머무를 때, 과연 그것이 내 연구실의 문턱을 낮추고 내 스크린리더의 가독성을 높이는 실제적인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가?
우리는 오랫동안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나누어 왔다.
마치 도서관에서 소설과 비소설을 분류하듯 말이다.
이 구분은 처음에는 효율적인 지원을 위한 인덱싱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기준은 사람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가두는 벽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아동, 노인, 장애인을 ‘취약계층’이라는 이름의 폴더로 묶는다.
그중에서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유독 ‘권리’를 강하게 주장해 왔다.
이것은 우리가 특별히 유별난 성향을 가져서가 아니다.
반복해서 배제되고, 스스로 요구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업데이트되지 않는 경험이 쌓인 결과다.
권리를 말한다는 것은 더 많은 대출 기한을 달라는 뜻이 아니다.
시스템의 기본 설정(Default)을 바꾸자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기념 방식은 과연 평등이라는 결론으로 향하고 있는가? 구분을 없애기 위해 만든 날이 다시 구분을 남기고 있다.
물론 내가 겪는 시각 정보의 부재는 분명한 물리적 한계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이유로 계속 구분을 유지하는 방식이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분을 유지한 채 평등을 말할 것인지, 아니면 구분 자체를 지워가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평등은 칸막이를 유지하면서 완성되지 않는다.
구분이 필요 없어지는 방향으로 데이터가 통합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
나의 34kg짜리 유기적 GPS, 탱고에게 4월은 그저 털이 많이 빠지는 계절일 뿐이다.
녀석은 ‘장애인의 날’이라고 해서 더 공손하게 안내를 하거나, 내 걸음 속도를 특별히 배려하지 않는다.
녀석에게 중요한 데이터는 하네스를 통해 전해지는 나의 체온과 매점에서 풍겨오는 치즈 냄새뿐이다.
녀석은 나를 ‘지원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그저 ‘함께 걷는 파트너’로 인덱싱한다.
이 녀석의 무심함이야말로 내가 꿈꾸는 완벽한 평등의 모델이다.
필요한 것은 기념이 아니라 전환이다.
장애를 특정 시기에만 소환되는 대상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체질 개선이다.
장애를 계속 불러내야 하는 사회는 아직 기본 라이브러리가 바뀌지 않은 사회다.
반대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사회는 이미 기준점이 이동한 사회다.
특정한 날에만 드러나는 삶은 쉽게 ‘감동 스토리’라는 제목의 콘텐츠가 되지만, 매일 반복되는 삶은 비로소 사회의 ‘기준’이 된다.
우리가 바꿔야 하는 것은 관심의 크기가 아니라 그 관심이 머무는 자리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념행사가 아니라, 덜 특별한 일상이다.
장애가 더 자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다.
장애를 계속 호출해야 하는 사회보다, 굳이 따로 부르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루가 아니라, 우리가 숨 쉬는 365일의 평범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