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우주

by 단발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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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책은 제목을 잘못 정했다. 결혼해도 괜찮아,라고 제목으로 써 버리면, 결혼해서 괜찮지 않은 사람들과 결혼해서 괜찮은 사람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표지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한글판의 제목을 ‘결혼해도 괜찮아’라고 쓰겠다면, 어떤 식으로든 ‘committed’라는 원서의 제목이 좀 도드라져 보여야 할 텐데, 내가 읽은 책에서는 절대반지 속에 새겨진 ‘committed’가 너무 은은하고 자연스럽다. 그래서, 제목과 표지에서 각각 감점 5 점하고 들어간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집필 직후, 아직 그 책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기 전,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남자 친구 펠리페와 약속한 대로 전 세계를 오가며 함께 생활한다. 반복되는 재회와 이별, 장시간의 비행과 엄청난 항공비를 다소 지불하고 나서, 브라질 출신의 호주 시민권자인 펠리페는 필라델피아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입국, 3개월 체류, 잠시 외국 방문, 다시 입국의 생활을 반복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입국 심사 도중 펠리페는 국토안보부 직원들의 제지를 받게 되고, 미국에서 영구 퇴출당한다. 펠리페가 미국으로 입국할 수 있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은 길버트와의 결혼. 결혼하지 않기로 약속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길버트는 펠리페와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국경 사고’가 이미 발생한 상태에서의 결혼은 당연히 의심받기 마련이어서, 두 사람의 입국 심사는 수개월에 걸쳐 계속 미뤄지고, 두 사람은 저렴한 돈으로 생활이 가능한 동남아시아 등지를 헤매고 다니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날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이 책은 그때 쓰인 책이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지만, 결혼하고 싶지 않은, 그럼에도 그와 결혼하는 것이 최선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들어가기 전, 결혼에 대한 고민과 고찰.



나는 결혼했으니, 아무래도 결혼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 만약 내게 결혼에 대한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더 크게 보인다면,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없을 테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지만, 나는 이혼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무 생각 없이 결혼한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놀라고 실망했던 경험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혼 생활을 통해 기쁨과 안정감, 정서적 지지를 얻는다는 점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




<존 F. 케네디 부류냐, 해리 트루먼 부류냐>에서는 부부간의 불륜을 연구한 심리학자 셜리 P. 글래스의 책 이야기가 나온다. 글래스 박사의 이론에 따르면, 건강한 부부 관계는 창문과 벽으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창문은 부부가 세상에 공개하는 관계의 측면, 벽은 부부간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지키기 위한 신뢰의 장벽이라고 한다. 기혼자들이 이성 친구를 사귀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지만, 문제가 생기는 지점은 바로 여기라고 한다.



그런데 이른바 아무런 해악도 없는 우정이 지속되면서, 우리는 결혼 생활 안에 감춰야 할 은밀한 비밀들을 새로운 친구와 터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비밀 – 가장 은밀한 욕망과 좌절들 – 을 털어놓고, 그렇게 털어놓았다는 사실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단단한 벽을 세워야 할 곳에 창문을 낸 격이고, 이내 이 새로운 사람에게 심중을 털어놓게 된다. 괜히 배우자의 질투심을 부추기고 싶지 않기에 그 사소한 사실은 배우자에게 비밀로 한다. 이제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아무런 장벽도 없이 빛과 공기가 마음껏 순환되어야 하는 부부 사이에 벽이 생긴 것이다. (149쪽)



그녀의 외가 쪽 여성들의 이야기가 특히 감동적이다. 외할머니 모드 모르콤 여사는 구개 파열로 입천장에 구멍이 생기고, 윗입술이 찢어진 채 태어났다. 수술을 받았지만 얼굴 한가운데 눈에 띄는 흉터가 남았고, 게다가 말을 빨리 하지 못했으니 그녀의 불행에 대해서라면 안타까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녀의 불운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외가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정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외할머니는 성적이 뛰어났고, 일을 하면서 학비를 버는 당시 미네소타 중부의 최대 돌연변이가 되었다. 즉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는 자주적인 아가씨가 된 것이다(214쪽).



1931년, 외할머니는 진짜 미용실에서 진짜 미용사에게 커트를 하고, 멋진 파마를 했다. 200달러나 주고 진짜 모피가 달린 화려한 와인색 코트를 사서 입고 다녔다. 그랬던 그녀가 사랑에 빠졌고, 외할아버지와 결혼했다. 외할아버지의 농장에서 시아버지, 도련님과 함께 살았다. 세 남자를 위해 요리와 청소를 도맡아야 했고, 농장 일꾼들의 식사까지 준비하는 일이 빈번했다. 아이를 일곱 낳았다. 큰딸이 태어나자, 그토록 아끼던 와인색 코트를 뜯어서 새로 태어난 아기의 크리스마스 의상을 만들어주었다.



내게 이 이야기는 우리쪽 사람들에게 결혼이 어떤 것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효과적인 메타포였다. 여기서 ‘우리 쪽 사람들’이란 우리 집안의 여자들, 특히 내 뿌리이자 근원인 외가 쪽 여자들을 말한다. 왜냐하면 자식을 위해 평생 당신이 소유했던 물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물건을 포기한 일은 우리 외할머니 세대의 모든 여성들(아울러 그 이전의 여성들)이 가족과 남편, 자식을 위해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217쪽)



이 책을 집필하면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결혼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던 저자가 외할머니에게 묻는다. 지금까지 사시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어요, 할머니? 그녀는 외할머니가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미장원에서 머리를 손질하던 때, 재단사가 맞춰준 와인색 코트를 입고 돌아다녔던 때였을 거라 예상한다. 외할머니께서 답하신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네 외할아버지와 신혼 생활하던 때였어. 올슨 가족 농장에서 함께 살던 때. 저자는 말한다. 나는 외할머니의 말을 믿었지만, 외할머니를 이해하지는 못 했다. 하지만, 2006년 자신의 집으로 그녀와 남자 친구를 초대한 젊은 부부 케오와 노이를 보며 그녀는 깨닫는다.



외할머니는 어떻게 1936년에 행복할 수 있었을까? 2006년에 노이가 행복한 것과 같은 이유다. 즉 자신이 누군가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동반자가 있고, 그 동반자와 함께 미래를 만들어나가고, 두 사람이 만들어나가는 미래에 확신이 있고,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219쪽)




자신만의 커리어를 가지고 직업적 성공을 이루기 직전, 남편의 비협조(이틀간의 휴가)로 직장을 그만두었던 저자의 어머니의 삶 역시 인상적이다.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저자의 어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 ‘자신이 누린 엄청난 혜택은 엄마의 희생이라는 유골을 바탕으로 했다’는 말을 지면을 통해 꼭 남기고 싶다는 저자의 말이 겹쳐져 들렸다.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어머니 중 한 사람으로서,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딸의 말이 내 딸의 말처럼 맘 속에 울렸다. 내 딸이 그럴 것 같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만약 내가 후회한다면 내 인생의 17년이 모두 의미 없어질 테니까.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모순 투성이지만, 그렇다고 모순 그 자체를 인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후회하지는 않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한다. 만약 내 앞에 똑같은 선택지가 있다면 지금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어쩌면, 전업주부로서의 이 우주가 아닌, 또 다른 우주 속으로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우주 속에 존재한다면, 지금의 이런 생각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다른 생각, 다른 고민, 다른 갈등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밥을 엄청 많이 먹고, 해뜨기 전에 일어나고, 하루 종일 그리고 오리고 붙이고,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그 애를 지금 내 앞에 데려다 놓는다면. 수영복, 발레복, 색색의 원피스, 핫팬츠, 옷에 맞는 니삭스에 깔맞춤 머리띠까지, 하루에 일곱 번 옷 갈아입는 그 애를 지금 이 앞에 데려다 놓는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막대에 원숭이처럼 매달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고, 소화기 안전핀을 뽑고서 태연하게 거품을 만지는 그 아이를 지금 내 앞에 데려다 놓는다면. 그렇게 해준다면 그 우주는 이 우주와 같을 것이고, 나는 지금의 나일 것이다.




하여, 이제 읽고 있는 책, 읽다가 잠깐 멈춘 책, 모른 척하려 했으나 서둘러 읽어야만 하는 책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8시 25분. 이 우주에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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