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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훈 Nov 26. 2021

기자가 '이야기'를 만났을 때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T.크리스천 밀러, 켄 암스트롱

기사(記事)를 영어사전에 검색하면 두 가지 단어가 나온다. 아티클(article)과 스토리(story). 후자보다 전자가 형식적이고 전문적인 인상을 주어서 인지 왠지 다들 아티클이라 할 것 같지만 영미권, 특히 미국의 기자들은 기사를 말할 때 주로 스토리를 사용한다고 한다. 만약 미국에서 활동하는 기자가 “What is your story?”라고 물어본다면 “당신이 지금 취재하는 기사는 무엇입니까?”라는 뜻이란 말이다. 언어는 한 사회에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태를 반영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기사를 스토리, 즉 이야기로 부르는 미국 기자들의 언어습관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한국에서 7년째 기자를 하고 있는 내게 “기사에 대해 아무 것이나 떠올려 보라”고 하면 팩트(fact·사실)나 주제 같은 것을 먼저 생각할테지만 기사를 이야기라 여기는 미국의 기자들은 인물이나 구성, 기승전결과 같은 문학적인 장치를 떠올릴 것이다.


미국 기자들은 왜 기사마저도 이야기처럼 쓰려고 할까. 인류의 탁월한 발명품 중 하나인 이야기의 장점을 생각해보자. 우선 재미있다. 고대 호메로스나 중세 셰익스피어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영화, 드라마, 소설, 만화 등 인류의 사랑을 받아온 오락물은 모두 이야기를 다양한 감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재미있는 오락물은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고 강하게 몰입하게 한다. “긍정적 몰입(flow)이 행복감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몰입의 즐거움>의 저자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주장을 가져와 발전시켜보자면 행복을 갈망하는 인간들은 오락물을 늘 곁에 두었고 (기사와 달리)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향유해왔다. 그래서 지상 최대의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기사마저도 상품성 있는 콘텐츠인 이야기로 만들려 하는 걸까.(이건 아무런 근거 없는, 개인적인 추론이다.)


굳이 상품가치를 언급하지 않아도 사회 현상을 왜곡 없이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글로써, 이야기는 적합한 글쓰기 방식이다. 이야기는 아주 길고 천천히, 또 세밀하게 어떤 현상이 벌어지게 된 과정을 담는다. ‘A가 살인을 저질렀다’와 같이 한 문장으로 끝날 수 있는 사건을 ‘A는 언제 태어났고 어떤 환경에서 자랐으며 이런저런 이유로 살인자가 되었다’라고 늘여서 말하는 식이다. 인과 구조를 따져 길게 서술하는 이야기는 비경제적이지만 고비용을 감수할 만큼 편익은 충분하다. ‘A가 살인을 저질렀다’라는 단편적인 정보는 적대, 분노, 불안 같은 부정적 감정만 고조시키지만 ‘이렇게 태어나 자라온 A가 저런 이유로 살인자가 되었다’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돕는다. 이야기는 일시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과 사회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이해, 공감, 연민, 화해로 나아가게 한다.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를 쓴 T.크리스천 밀러와 켄 암스트롱. 두 사람은 모두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매체 <프로퍼블리카>의 수석 기자이며, 이 기사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앞서 서술한 장점을 모두 갖춘 ‘이야기’로 꼽고 싶은 기사가 있다.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매체 프로퍼블리카(propublica)의 수석 기자인 T.크리스천 밀러와 켄 암스트롱이 공동 집필한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An Unbelievable Story of Rape)>다. 부록까지 약400쪽에 달하는 이 책은 2015년 12월에 보도된, 같은 제목의 1만2000단어로 된 기사가 원작이다. 연쇄 강간범 마크 P. 오리어리에게 강간을 당하고 신고했지만 수사기관으로부터 되레 허위 신고죄로 처벌 받은 피해여성 마리가 겪은 사건이 중심축을 이룬다. 하지만 단순히 사건을 보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리어리가 저지른 5건의 강간 사건을 파헤치고 강간 피해를 신고하는 여성을 의심하고 보는 잘못된 성폭력 수사 관행을 고발한다. 또 가해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강간범이 되었는지도 다룬다.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은 (결코 기자의 질문에 대답만 하는) 취재원으로 보이지 않는다. 저마다 다양한 사연과 생각, 감정을 지닌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로 묘사된다. 피해자 마리, 노부인, 세라, 도리스, 릴리, 앰버와 가해자 오리어리 그리고 미결 사건이 될 뻔한 이 사건을 해결한 두 명의 여성 형사 갤브레이스와 헨더샷까지. 저자들은 이들을 단순 취재원(혹은 인터뷰 대상)이 아닌 살아 숨쉬는 캐릭터로 그리기 위해 치밀하게 디테일을 모은다. 얼핏 보면 기사 전체 내용이나 주제엔 전혀 연관이 없을 법한 정보들까지 모조리 집어넣는다.(마리가 사는 워싱턴주 린우드의 지역적 특성까지도) 또 저자들은 2차 가해, 모방 범죄의 위험을 무릅쓰고 피해자들이 용인하는 선 안에서 범행 과정과 수법도 상세히 서술한다. 저자들은 “캐리커처가 아니라 개별적인 인물로 묘사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어느 정도의 디테일은 추가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기사 속 인물들을 대상화된 객체(피해자, 가해자, 형사)가 아닌 개별적인 인물로 그리기 위해 디테일을 의도적으로 살렸다는 의미다. 그 덕분에 기사에 등장하는 조연들, 심지어 범인을 잡는데 기여한 레이크우드 경찰서의 범죄 분석가까지도 생생한 캐릭터가 된다.


픽션보다 더 픽션 같은 이 논픽션은 넷플릭스에서 8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구성’의 측면에서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는 통상적인 기사의 문법을 완벽하게 탈피했다. 이야기는 2010년 허위 신고죄로 고발된 마리가 경찰의 협박을 견디다 못해 “강간당한 게 아니”라고 허위자백을 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 챕터는 2011년 1월 또 다른 피해자 앰버의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갤브레이스의 시점에서 펼쳐진다.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저자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해자 오리어리의 이야기는 책의 중반부가 시작될 무렵에서야 나온다. 중심 사건인 허위 신고자로 의심 받는 마리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모든 실마리를 제공하는 건 아니다. 독자들이 마리를 믿을 수 있게 확신을 심어주지도 않은 저자는 마리가 성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이야기의 후반부에서야 등장시킨다. 이는 이야기의 구조상 반전이 가져다주는 묘미를 의식한 설정이었을 것이다. 모든 기사의 핵심 정보는 첫 문단에 넣어야 한다는 ‘역 피라미드 기사 작성법’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한국 기자의 눈으로 보면 이 기사는 전혀 ‘기사답지 않은 기사’다.


하지만 어떤 기사보다 기사다운, 완벽한 기사라고 단언하고 싶다. 전혀 기사 같지 않은 이 기사를 읽다보면, 어느 순간 마리라는 개인에 대한 연민을 넘어서 강간 피해여성을 '일단 의심'하고 보는 사회의 오랜 관행과 편견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다. 10년 전 미국에서 벌어진 실화를 다루는 이 기사를 두고 사람들은 "탐사보도의 승리" "참담하지만 반드시 읽어야 할 글" "소설처럼 감동적인 탁월한 논픽션"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한 마디를 보태자면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처럼 한 사건을 깊게 파헤쳐 선보인 저널리즘 논픽션은 그 어떤 선언적인 언동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선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직접 줄을 그으며 한참을 머물렀던 이야기의 대목을 소개하고 싶다. 이 사건을 해결한 갤브레이스 형사가 직접 한 말이자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의 핵심 주제, 그리고 기자들이 이야기를 다룰 때 지켜야 할 원칙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피해자를 믿어라. 무조건 피해자부터 믿어라.’ 하지만 난 그것이 옳은 관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피해자의 말을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일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확증할지 반박할지 결정합니다.”(30쪽, 갤브레이스 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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