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개적 요구는 '민폐'가 되었을까?

복지 이용을 둘러싼 흔한 논리들 (정치이론적 관점 & 칼 슈미트)

by 호숲

이틀전 나는 내가 속해있는 조직의 복지 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전화를 걸었다. 3주 전에는 대면으로, 1-2주 전에는 소식 공유를 위한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도 지속적으로 민원을 넣었지만 개선은 커녕 대답 조차 듣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 뿐만이 아니라, 3주 내내 다양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 그러면서 담당자는 본인이 원하는 질문들에만 아주 가끔 선별적인 답글을 달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나는 이 문제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닌, 사람들의 안전권과 생존권, 그리고 기본적인 학습권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전화를 걸었지만, 의도적인 침묵을 포함한 너무나 무책임한 응대를 당했다. 상급 책임자에 연결을 해보니, 민원이 논의조차 안돼 상황 파악이 전혀 안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나라도 지금 어떤 상황인지, 사람들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들어보고 모아서 전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입장에서는 번거롭겠지만, 결정권자들이 상황 파악을 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할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익명의 오픈 채팅방이었기에, 내가 누군가를 대표해서 의견을 전달한다는 말은 하지도 않고 생각조차 못했다. 그저 한명의 개인적 이용자로서, 조직의 일원으로서 의견이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취합하여 제출하면 효율적인 논의 과정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하였다.


위 내용과 같은 나의 생각, 그리고 내가 가진 개인적 문제의식을 정리하여 300명이 넘는 오픈 채팅방에 올렸다. 그리고 후딱 구글폼을 제작하여 링크도 공유를 했다. 의견을 달라는 강요도 안했고, 지속해서 의견을 제기하지만 응답을 받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꺼번에 수렴해서 내가 행정실과 이야기하는데 하나의 근거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점 또한 명확히 밝혀두었다.


그러나 내가 쏘아올린 공(!) 때문인지 그날 내내 오픈채팅방 내에서는 꽤나 매서운 논쟁이 오고갔다. 구글폼을 들여다보니 꽤나 많은 사람들이 빠른 시간 내에 응답을 정성스레 해주는 상황이었고, 80-90퍼센트는 내 문제의식에 공감을 해주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 10-20퍼센트는 나를 비롯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 자체에 대한 비판이 담긴 글들이었다. 흥미롭게도 채팅방 상에서는 이 문제제기 자체에 대한 비판의 메세지들이 조금 더 많이 올라왔으며, 이런 메세지가 받는 좋아요 수 또한 내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글들보다도 훨씬 많이 받기 시작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내가 받았던 비판의 내용 역시 우리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는 논리로 보이는 듯 하여, 이 기회에 유형화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복지를 비롯한 공공 서비스의 개선에 대한 요구는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공동체의 편의를 위한 서비스에 대한 개인의 목소리는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고 수용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복지에 대한 개선 요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시각으로 제공자와 이용자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는가?



우선은 복지에 대한 개선 요구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유형과 내 생각을 조금 정리해보고자 했다.


(참고로 내가 문제제기를 했던 대상은 행정법상 공공기관이 구성원의 기본적 활동을 돕기 위해 공적 자산으로 제공하는 복지적 공공 서비스의 성격을 띈다고 볼 수 있다.)



image.png 내가 보낸 이메일의 일부





1. 법 실증주의와 시혜적 복지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권리의 근거를 명시적 계약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관점이었다. 조직의 일원이 되는 절차와 계약 속에 복지의 내용이 포함 되어 있지 않으니, 복지 자체가 구성원의 당연한 권리가 아닐 뿐더러 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권리 또한 없다는 점이다. 더 그렇기 때문에 제공되는 서비스는 구성원들의 사회권적 기본권이 아닌, 조직의 '자비로운 시혜' 정도로 파악한다. 즉, 수혜자가 제공자에게 더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도덕적 해이나 결례로 간주되는 것이다. 시혜를 받은 자는 부채의식과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규칙으로 규정하며, 그에 대한 또 다른 요구는 배은망덕한 행위가 된다.


문제 제기자의 태도나 방식을 법적 잣대로 평가하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충분히 공적이고 정치적인 논의가 가능한 사안을 개인 간의 윤리적, 법적 다툼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복지의 제공자가 책임지거나, 최소한 논의를 해야 할 사안을 구성원들끼리 서로 "너 무례해" "너 고소할거야"라며 행동을 비정치화 하고 갈등을 사유화 시키려는 현상도 조금 엿볼 수 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가장 할말이 많다. 먼저, 나 또한 명시적 법조문이나 계약에 근거하여 기본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논의해볼 만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밤새 내가 가진 문제의식의 책임 근거를 찾으려 다양한 자료들을 찾았다. 현재 제공되는 서비스가 어떤 방식으로 공고가 되었고, 외주 업체와는 어떤 방식으로 입찰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법적, 계약적 근거들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 결과, 내가 제기하는 문제점들은 애당초 외주 업체와의 계약 과정 속 입찰 평가항목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사항들이었다. 물론 이용자인 구성원들과 기관 간의 계약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관 측도 이 복지를 단순한 시혜가 아닌, 정량적 지표로 관리하고 책임져야 하는 공적 업무로 정의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자료조사 과정 안에서 이 계약 관계 등 행정 처리에 대한 여러 문제점들이 확인 되기도 했는데, 해당 내용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해명을 요청하고 언론사에도 일단 제보를 해놓은 상태이다.)


즉, 단순하게 복지는 계약 내용에 없으므로 이용자들은 어떤 요구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정작 계약의 실체를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오히려 수사적 법치주의를 이용하여 계약이라는 단어로 입 막음하려는 의도가 더 분명히 보였다. 이렇게 된다면 이들에게 법과 계약은 구체적인 권리와 의무를 논의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권위의 상징으로만 전락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더 나아가, 법치주의를 말하면서도 정작 본인의 행동은 규범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게 아닌, 어떤 규범을 무시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하나의 결단적 행위라는 점을 간과한다. 법의 중립성 위에서 발화한다는 착각 안에서는 사실 본인의 정치적 편의를 위해 법의 특정 부분을 유예한다는 모순이 담겨 있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결국 기관이 마땅히 져야 할 행정적 책임 조차도 은폐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닐까.


(다 쓰고 보니 복지를 시혜적 관점이 아닌 사회적 시민권, 국가의 역할, 권리에 대한 관계론적 관점 등을 쓰는 걸 깜빡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논의인데 .. 시간이 될 때 내용 추가 예정!)




2. 자유지상주의적 개인주의와 자기 책임


어쩌면 설득력이 있어 보일 수 있는 "네가 선택해서 온 것이니, 그 불편함도 네가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선택의 자유와 그에 따른 결과의 인수를 강조한다. 이는 일종의 자기 소유권과 시장적 합리성에 기반한 논리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기관과 조직에 들어온 개인의 선택을 전적인 '시장적 선택'으로 환원하며, 그 선택에 포함된 모든 리스크를 개인의 책임으로 손쉽게 돌려버린다. 즉, 공공의 문제를 철저히 사적인 선택과 거래의 영역으로 끌어내린다.


이 논리의 가장 큰 특징은 구성원들을 '시민'이 아닌, 시장에서 상품을 고르는 '합리적 소비자'로만(!) 상정을 한다는 점이다. 이 안에서 포착할 수 있는 세밀한 논리 구조는 다음과 같다.


- 선택은 곧 동의다: 선택을 한 순간, 그 선택에 따르는 모든 잠재적 불편함에 대해 사전에 포괄적으로 동의했다는 논리. 따라서 이 프레임 안에서 이용자의 요구는 정당한 권리 주장이 아닌, 자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를 부정하는 결정의 번복 혹은 계약 위반으로 간주된다.


- 위험의 사유화와 원자화: 시스템의 물리적 한계가 공공의 위험을 야기하더라도, 그 위험을 개인의 성실성 문제를 치환한다. 개인의 자산을 어떻게 활용하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고, 그에 따른 문제도 개인의 과실로 귀결된다. 시스템의 결함은 사라지고, 오직 원자화된 개개인의 문제만 남는다.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의 '자유지상주의'론 참고)

그렇다면 이 문제는 인간이 과연 개인적/사적 존재인가, 공적 존재인가 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서 살펴봐야 할 문제다. 과연 인간의 존재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장 자크 루소(Rousseau)가 가졌던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대목을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자연인'과 '시민' 사이의 모순이다. 그를 하나로 만들어라, 그러면 그는 가능한 한 가장 행복해질 것이다. 그를 온전히 국가에 내주거나, 아니면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남겨두라. 그러나 그의 마음을 둘로 나눈다면, 당신은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게 될 것이다. - 장자크 루소, <에밀>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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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들과 같이 인간의 개별성과 더불어 공공성에 대한 포괄적 고려 없이, 인간을 철저히 시장 논리의 일원으로, 특히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서비스 구매자 만으로 바라본다면 조직과 공동체는 어떻게 될까? 결국 모든 조직의 논의는 시장적 주체들의 각자도생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다. 시장 논리에 따르면, 구매자는 상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평하기보다 다른 상품을 찾아 떠나야 한다. 불만을 제기하며 발생하는 다양한 숙의 과정, 정치적 역동성과 가치는 전면 부정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를 부정하겠다는 것 또한 하나의 선택이라고 본다면, 과연 인간 사회 내에서 모든 것을 완벽한 시장 논리와 책임으로 귀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3. 기술관료적 공리주의


예산과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소수의 불만을 다 들어주면 시스템 전체가 붕괴한다는 점을 (넘겨짚고) 우려하는 논리이다. 자원의 희소성과 관리의 효율성을 유독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정치의 핵심을 비용-편익 분석으로 바라본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이 행정 시스템 자체를 하나의 '파레토 최적(Pareto Optimality)' 상태로 보아, 현 시스템은 이미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 시킨 상태로 취급하므로 문제제기로 인해 누군가 이득을 보려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하는 제로섬 게임이 시작된다고 믿는 부류이다. 이에 대한 자신들의 경계를 공리주의적으로 바라보며, 또 다르게 야기될 수 있는 피해에 대한 강조를 통해 문제제기를 묵살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검토해볼 수 있는 전제는, 이들이 생각하는 정치적 갈등은 무엇인가 따져보는 것이다. 이들에게 정치적 갈등은 '가치의 배분'이 아닌 '행정적 관리'의 문제로 완전히 치환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들이 대표한다고 믿는 '인민'은 누구인지, 그 인민이라는 기표는 누가 점유하고 있는지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문제제기를 한 당사자도, 그 문제제기를 다시 비판하는 사람도 모두 인민 즉 공동체 전체를 빠짐없이 직접적으로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적 피해를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 속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은 이미 '인민'이라는 범주 밖으로 나가 이기적인 개인으로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다. 동시에, 그들에게 인민은 '침묵하는 다수'(라는 착각)이다. 이들은 유령적 다수를 호출하여 자신들을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다수'의 대변인으로 셀프 설정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인민이라는 기표를 본인들 위주로 선점해버리며, 문제 제기자는 공동체의 정당한 일원으로서 발언할 자격을 박탈시킬 수 있는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정당성의 근거에는 정치적 가치 판단이 아닌, 행정적 관리와 효율에서 찾는다. (물론 이들이 말하는 효율은 무엇일지 또 다시 논의해볼 수 있지만!)


여기서 소수의 목소리더라도, 공동체 모두를 대표할 수 없더라도 발언할 자격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예 새로운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무엇인지, 정치는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지, 중요한 정치적 가치를 향한 숙의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등. 그러나 이 사태에서는 이러한 기술관료적 공리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실질적 '다수'를 대표하는지 조차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의견 조차 명확한 수치와 사람들의 객관적 의견이 어떠한지와 관계 없이, 이 또한 행정적 편의를 위한 하나의 정치적 행동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4. 의사소통윤리와 공론장의 성격 논쟁


마지막으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논리는 바로 질서와 예의를 강조하는 부류이다. (애초에 나는 예의없게 굴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이들은 공적 문제의식을 정치적 협상의 대상이 아닌, 개인 에티켓의 문제로 환원하려고 한다. 한국식 유교문화, 예의범절 등에 대한 내용은 여기서 정리할 가치가 딱히 없을 것 같으니 제외하고, 과연 공론장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좀 더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때,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의 '치안'과 '정치'의 대립 개념을 떠올려볼 수 있다. 위에 언급한 유형들은 모두 문제제기의 목소리를 단순한 기술관료, 행정, 혹은 경제적 문제로 치환했다면, 예의와 질서를 강조하는 목소리는 랑시에르적 의미에서 '치안'의 목소리로 간주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수혜자는 수혜자의 자리에서, 관리자는 관리자의 자리에서 각 할당된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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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정치란 무엇인가는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정치는 이 '치안적 질서' 안에서도 본래 '몫 없는 자들'이 목소리를 내며 기존의 셈법을 흔드는 과정이다. 즉, 본인의 몫이 아예 없거나 혹은 할당량이 정해져 있더라도 그에 마땅한 것들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의 상황에 대한 귀기울임, 그리고 그에 따르는 개선책에 대한 논의를 위해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예의에 대한 프레임이 적용된다면, 이러한 목소리와 귀기울임의 과정은 모두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순물'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제자리를 찾으라는 말 뿐이 해답이 된다. 그렇다면 이들이 요구하는 예의란 사전적 의미의 '상호 존중의 표시'로 활용되는 것이 아닌, 그저 시스템의 입장에서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억압하기 위해 사용되는 위장된 언어에 불과하지 않은가?




결국 공공서비스와 복지에 관한 이 논의의 근원에는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빠질 수 없다는 점은 확실하다. 특히 정치의 영역과 시장경제, 행정, 치안의 영역의 구분과 그에 대한 이해가 사람마다 각기 상이하여 나타나는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정치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통찰을 제시한 칼 슈미트 사상의 관점으로 현 상황을 바라보면 어떨까?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 <정치적인 것의 개념>, <로마 카톨릭교와 정치적 형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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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슈미트에게 시장경제, 행정, 치안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와 다르다. 따라서 슈미트는 근대 자유주의 시스템이 정치의 문제를 모두 경제나 윤리의 문제로 환원해버리는 특징을 가졌다고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사상가이기도 하다. 즉 자유주의는 중요한 문제들을 정치화 하는 과정 자체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며, 정치화의 근간이 되는 '갈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고 한다는 점을 슈미트는 지적한다.

그렇다면 슈미트에게 정치는 무엇인가? 잘 알려진대로 그는 적과 동지의 구분, 그리고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주권자의 존재를 정치의 기본 요건으로 상정한다. 더 나아가 만약 문제제기의 상황을 하나의 갈등, 즉 정치의 문제로 인식하게 된다면 이는 반드시 그에 대한 희생과 결단 그리고 책임이 누군가에게는 따르게 된다는 것이 정치의 특징이다. 어쩌면 법적 수사, 시장경제적 자유, 예의와 질서에 대한 강조는 우리 사회가 그 어떤 종류이든 반드시 갈등 상황이 존재하는 정치적 공간이라는 점 직시하고, 그에 대한 결단과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어 기제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공공 서비스가 기존과는 다른 방법으로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은 하나의 예외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내 개인적 의견일 수 있다). 이 복지 서비스가 고안되고 제시된 원래의 의도대로 작동되지 않은 상황이며, 이에 대한 기존의 이용자들이 굉장한 일상의 피해를 겪고, 민원을 하고 그에 따른 제대로 된 응답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축적되며 발생하는 혼란과 갈등이 점점 증폭되고 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상황에서는 (그게 어떤 종류이든) 관리자는 이에 대한 결단을 할 필요가 있다. 즉, 상황을 이대로 쭉 지속시킨다고 하든, 변화를 준다고 하든 상관없이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조차도 부정하며 화살을 문제제기자에게 돌리는 행위는 결정의 존재와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며, 어쩌면 오히려 결정이 두려워 시스템의 관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image.png 내가 보낸 이메일의 일





결론적으로 오늘 오전 나는 유관 부서 최종 의사결정권자로부터 설문을 해줘서 고맙다는 연락을 받았고, 내가 제기한 문제 상황들에 대한 시스템 개선 및 이후 민원에 대한 관리 체계 방식에 대한 공지가 올라왔다.

결국 시스템이 개선이 되면, 문제제기를 한 사람이나 문제제기를 반대하며 심지어는 비난했던 사람이나 모두 그 개선된 시스템의 장점들을 함께 누리고 공유할 수 있게 되는 이 현실. 이걸 뿌듯해 해야 할지 억울해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 , 어찌 되었든 조금이나마 다양한 목소리들을 듣고 또 반영할 과정이 주어졌다는 점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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