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축소와 감각의 상실
“AI 시대에도 인간다움은 어떻게 남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감각으로 경험하는 현실보다 상징으로 소비되는 현실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SNS 속 해시태그, 이미지, 짧은 영상들은 실제 경험을 넘어서는 힘을 가집니다.
실제로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흐릿해지고, 그 삶을 어떻게 포장해 나타냈는지가 진짜 경험처럼 여겨집니다.
AI 시대의 초개인화(Hyper-personalization)는 우리의 삶을 놀라울 만큼 편리하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기 전에, 알고리즘은 이미 그것을 추천합니다. 검색하기 전에 광고가 떠 있고, 노래가 생각나기도 전에 재생 목록이 제안됩니다.
겉으로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예측된 범위 안에서만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편리함은 커졌지만, 동시에 자율성은 좁아졌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시스템이 길러준 욕망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입니다.
AI 기반의 예측 분석(predictive analytics)은 사용자의 행동을 미리 읽어냅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삶은 점점 더 데이터 패턴의 집합으로 환원됩니다. 기분, 집중력, 수면 패턴이 수치로 정리되고, 그 수치가 곧 ‘나의 상태’를 대신합니다.
그러나 이 구조는 인간성을 서서히 축소시킵니다. 우연한 선택, 예기치 못한 만남, 모순된 감정 같은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이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불완전하고, 모순되며, 때로는 비합리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AI 사회는 효율적이고 예측 가능한 나만을 남겨두려 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세계는 내 감각을 통해서만 열린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세계를 머리로 추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을 통해 직접 경험합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감각 속에서 세계가 ‘살아나고’, 나 또한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 감각적 경험을 상징과 기호로 빠르게 대체합니다. 거리를 걸은 기억보다, 그 거리를 찍어 올린 사진이 더 선명하게 남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와 “객관적 대상”으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계와 나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라, flesh라는 공통의 차원에서 서로 얽혀 있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런 철학적 감수성을 예술적으로 풀어낸 작가가 김수자입니다. 그녀의 거울 설치 작업은 관객이 몸으로 세계와 뒤섞이는 체험을 만들어냅니다.
김수자의 ‘거울-빛-공기’ 작품 속에서, 거울 바닥은 관람자가 단순히 “대상을 본다”는 지점이 아니라, 스스로가 건축물·하늘·타인과 겹쳐지는 장을 형성합니다. 이때 대상은 나의 몸이 세계 속에서 드러나는 동시에 세계를 비추는 하나의 “표면”이 됩니다.
이 순간 관객은 더 이상 “내가 주체, 저것이 대상”이 아니라, 세계와 내가 같은 flesh의 장에서 반짝이며 공존하게 됩니다. 이는 메를로퐁티가 말한 flesh의 현상학적 체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flesh는 세계와 내가 이어지는 공통의 존재적 바탕을 뜻합니다.
메를로퐁티는 시각을 단순히 “투명한 창”으로 보지 않고, “몸을 가진 시선(le regard incarné)”으로 이해했습니다. 즉, 보는 순간 나 또한 보이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지요. 김수자의 거울 설치는 시선을 반사시켜 “내가 본다”와 “내가 보여진다”를 동시에 체험하게 합니다. 이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가시적인 것(le visible)과 비가시적인 것(l’invisible)이 서로 스며드는 체험과 맞닿아 있습니다.
결국 ‘무한히 열리는 세계를 몸으로 체험한다’는 점에서, 김수자의 작업은 메를로퐁티의 공간 개념을 감각적으로 구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AI는 기억을 대신 저장하고, 구조를 대신 설계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와 김수자의 작품처럼, 삶을 사유하고 감정을 통합하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AI는 내가 본 것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순간의 공기와 체온, 불완전한 침묵이 주는 의미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AI 이후의 인간성이란, 오히려 AI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에서 다시 발견됩니다.
• 감정을 언어로 살아내는 경험
• 모순된 욕망을 품고 흔들리는 순간
• 예측되지 않은 만남 속에서 관계 맺는 일
이것이야말로 초개인화된 사회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고유한 경험입니다.
친구와의 따뜻한 대화, 예상치 못한 우연의 만남과 같은 개인의 삶 속 작은 장면들은 상실된 감각을 되살리고, AI를 넘어서 인간의 고유한 감정을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예측하고, 분류하고, 소비하도록 훈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김수자의 거울 앞에서 한 발을 내디딜 때처럼, 순간의 공기와 체온, 불완전한 침묵은 수치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그 작은 불확실성들 속에서야 비로소 ‘살아 있는 나’가 다시 열립니다."
#상담심리학 #심리학자 #심리에세이 #AI시대 #인간성 #정체성 #감각의상실 #경험의회복 #현상학 #존재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