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나쁜 게 아니야. <바람바람바람>
저는 문제작을 좀 좋아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작품, 그러니까 <은교>나 <나의 아저씨> 같은 작품이 작가/감독의 의도와 다른 오해를 받으면 변호하고 싶어져요. 그리고 그런 작품들은 대체로 사회 통념상 받아들이기 조금 어려운 작품인 경우가 많습니다. 욕을 먹더라도 좋은 작품을 보면, 고집을 부려보고 싶습니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어떨까요?라고.
이병헌 감독도 그런, 오해를 많이 받은 감독 중 하나입니다. <스물>에서 '떡'과 '섹스'로 점철된 대사로 여성을 대상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감독은, 최근 <극한직업>과 드라마 <멜로가 체질>을 통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듯합니다. 그런데 작품들을 쭉 감상해보면 이병헌 감독의 시선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시놉시스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지만 영화를 직접 관람하면서는 항상 감독의 따뜻한 휴머니즘이 느껴졌습니다. 그가 말하고 싶었을 메시지도요.
영화 <바람 x3>은 보자마자 변호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영화였습니다. 혹시나 해서 영화의 평이 어떤지 조금 검색해 봤는데 역시, 비난 일색이더군요. 그런데 완성도를 가지고 혹평을 하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억지로 영화가 가진 흠을 비틀어본다면 개연성이 좀 부족하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지만 저는 러닝타임 동안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거든요. 분명 약점은 있지만 장점으로 효과적으로 틀어막았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우디 앨런의 그것하고 상당히 많이 닮아 있었어요. (음악 사용이나 오프닝 등) 결국 사랑과 삶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화였고. 그런 영화들, 정말 좋아하거든요. 영화는 역시 삶에 대해 이야기해야죠.
영화는 제목부터 <바람 x3>이다 보니, 시작부터 바람을 다룹니다. 제주도에서 운전기사를 하고 있는 석근(이성민)의 차에 어떤 유부녀가 타서는,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덮쳐야 하니 미행해달라고 부탁해요. 석근은 자기 나름대로 바람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은 그게 나쁜 짓인 줄 모른다") 남편의 차를 미행합니다.
유부녀는 불륜의 현장을 목격하자마자 상간녀에게 돌진해서 머리채를 잡고 싸웁니다. 그 뒤에서 석근이 싸움을 말리며, '바람을 폈으면 남편을 패야지 왜 여자를 패냐'라고 핀잔을 줍니다. 그러게요. 룰을 어긴 건 남편인데 왜 상간녀를 패는 걸까요?
여기에 적용되는 사회의 룰은 하나입니다. 혼인을 한 남녀는 일부일처를 유지하며, 다른 이성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뭐, 도덕적으로 보자면 여자도 물론 잘못이 있겠지만 사회의 죄악을 저지른 것은 남편입니다.
그런데도 남편이 아닌 상간녀를 팬다는 것은 이 감정이 정의 구현보다는 질투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게 맞겠네요. 나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었다는 것에 대한 원망. 이를 통해 감독은 처음부터 영화를 관통하는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바람은 왜 나쁜 걸까요?'
우리는 '바람'이 다 나쁜 것인 줄 알고 있죠. 하지만 그게 왜 나쁜 거야?라고 물어보면 보통은 '그냥!! 무조건 나쁜 거지 바람은!! 뭘 이유를 찾고 있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감독은 그게 궁금했나 봐요. 여러분은 바람이 왜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봉수(신하균)는 당구장에서 우연히 만난 제니(이엘)에게 끌려버립니다. 사실, 끌렸다기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웠을 거예요. 봉수는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을 남자였고 제니에게 추파를 던진 적도 없었으니까. 이 남자가 얼마나 안전한 남자냐고요? 레스토랑까지 찾아와서 대놓고 유혹하는 제니에게 미영(송지효)과의 러브스토리를 털어놓아 제니의 심기를 건드릴 정도의 남자입니다.
그러나 "나, 봉수 씨랑 자고 싶어요."라고 거부할 수 없는 마성을 뽐내는 제니.
봉수는, 레스토랑 운영 시간이 끝나고 찾아온 제니가 음식을 주문하자 이때다 싶어서 갈고닦은 중식요리 실력을 자랑합니다. 그게 제니를 꼬시고 싶어서였을까요? 아닐 겁니다. 봉수는 누구든 자신의 요리를 먹고 싶다 하면 기꺼이 해줬을 거예요. 미영이 자신을 받아주고 있지 않았으니까. 누구에게든 '진짜 나'를 인정받고 싶었던 겁니다.
요리를 '삶'과 치환해보면 영화는 상당히 흥미로워집니다. 미영과 봉수는 이태리 요리학교에서 만났는데, 봉수는 이태리 요리에 관심이 없고 미영은 소질이 없어요. 그런데 8년이 지난 지금 결혼을 해서 함께 이태리 음식점을 하고 있죠. 봉수는 중식 요리가 해보고 싶지만 미영은 절대 안 된다고 막습니다. 결혼생활이란 게 다 그런 거죠. 봉수는 짜장이지만 둘은 파스타로 만났고, 파스타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 봉수의 앞에 중식요리를 해달라는 제니가 나타난 겁니다. 중식요리를 해보니 적성에도 맞고 훨씬 더 맛있어요. 봉수가 살고 싶은 방향, 봉수를 무시하고 억압하지 않는 방향으로 제니가 물꼬를 터준 거죠. 자신이 생긴 봉수는 미영에게 중식요리를 선보이고, 그 맛에 반한 미영은 레스토랑을 중식 레스토랑으로 바꿉니다. 둘 사이의 관계도 훨씬 좋아집니다.
하지만 봉수는 동시에 '진짜 자신의 삶'을 되찾게 해 준 제니와 섹스를 하는 사이가 됩니다. 사랑은 아닌 것 같지만 짜릿하고 좋아요. 미영에게 받을 수 없는 위로와 용기를 얻고 더 활기찬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이 좋아요. 미영에게도 더 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신나는 발걸음은 '불륜 마스터' 석근에게 딱 걸리죠. 너, 바람피우냐?
영화는 다행히도, 모든 캐릭터를 다 깨달음의 길로 이끕니다. 이 영화는 남성 캐릭터의 시선에서 써졌기 때문에 미영이나 담덕의 스토리는 비교적 약하게 그려져 있어요.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이 영화는 남성에게 더 불리한 영화입니다. (부각되어서 상대적으로 더 나쁜 놈으로 보이거든요. 물론 석근은 좀 욕먹을 만 하긴 한데...)
하지만 감독은 관대하게도 이 남자들에게도 깨달음의 순간을 내려주죠. 석근의 깨달음의 순간은 담덕의 시각장애인 안마사에게서 왔습니다.
"외로움은 독성이 강합니다. 누난 그 독성을 매일 삼켜야 했습니다. 누난 장미가 아니라 튤립을 좋아했습니다. 누나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서 뭐합니까. 당신은 상대방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바람기 때문에 담덕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내가 다른 것들을 보고 다니느라 담덕의 마음을 얼마나 방치해 두었는지, 자신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담덕과의 관계가 이렇게 부족했는지 석근은 처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담덕을 용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용서 운운할 처지가 되긴 하나요?) 큰 충격에 빠진 석근은 봉수를 불러 술을 마시며 한탄합니다.
"장미가 아니고 튤립을 좋아했대. 뭘 좋아하는지 보면 아는 건데. 그냥 보면 아는 건데 왜 안 봤을까."
"다른데 보시느라."
"그래 맞아.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 보느라 그랬다 내가."
봉수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의 바람이 석근에게 들통났을 때, 봉수는 석근에게 매달리죠.
"형님! 저 미영이 사랑합니다. 예, 미워한 적도 있었죠.
그런데 미워한 게 가짜였고 사랑한 게 진짜였습니다.
진짜 하고 가짜 하고 구분 잘하고 살겠습니다."
가짜에게 마음을 뺏기는 경우, 참 많이 보입니다. 봉수가 제니와 함께한 순간들? 즐거웠겠죠. 사실 봉수는 제니가 없었으면 사랑의 의미에 대해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즐거움과 사랑의 감정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죠. 내가 더 즐겁고자 하는 이기심을 내려놓는 마음이고. 봉수는 자신이 즐겁기 위해 제니를 만났지만 행복을 바란 건 미영이었습니다. 늦게나마 그걸 깨달아서 참, 다행이긴 한데요.
문제는 이걸 깨달았다고 해서 과거가 없는 일이 되냐는 겁니다. 과거는 그대로 그곳에 존재할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과거를 벌주고 바로잡기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하는 것일까.
잘 모르겠습니다. 각자의 가치 판단에 맞기는 거죠. 어떤 사람은 과거가 계속 밟혀 도저히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현재와 행복이 더 중요하다며 잊고 용서할 수도 있습니다. 감독도 그걸 딱 정해서 메시지로 전달하려고 하진 않아요. 그래서 결말을 오픈해둡니다.
이런 불륜을 다룬 영화가 뭐가 재밌냐, 불쾌하고 더럽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불륜영화를 사랑(?)합니다. 불륜 영화는 반드시 육체적 관계와 정신적 사랑, 둘 모두에 대해서 다루거든요. <크레이지, 스투핏 러브>에서도 유혹하는 육체적 사랑과 인내하는 정신적 사랑을 말하잖아요.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조화되지 않을 때 불륜이라는 함정에 빠진다는 것을 영화가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 상황에 가보기 전에 미리 생각할 시간을 주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이병헌 감독, 대사 참 잘 씁니다. 빵빵 터져서 호흡곤란이 올 정도로 웃긴 <극한직업> 같지는 않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미소가 가시지 않습니다. 이병헌 식 언어유희죠. 특히 신하균 배우의 기용이 굉장히 적절했던 듯합니다. 신하균 씨는 사실적인 연기보다 극적인 연기가 더 잘 어울리는 배우거든요. 송지효 씨와 치고받는 대사, 이성민 씨와의 기깍기(배우들의 합, 호흡)가 영화에 리듬을 살려주면서 소소한 웃음을 줍니다.
아니면 롤러코스터나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통해서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죠. 이렇게.
<바람바람바람>은 좋은 영화입니다. 영화 보고 화가 잔뜩 난 리뷰들 믿을 필요 없습니다. 성적 억압에 익숙하거나 유교적 윤리의식이 투철하여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불륜을 너무 가볍게 다뤘다고 화를 내는 대신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병헌 감독이 그렇게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지 않는 감독이라는 사실도.
감독은 <극한직업>을 통해서 자신이 기본기뿐만 아니라 기교도 갖춘, 훌륭한 감독이라는 것을 증명했죠. 솔직히, 앞으로 영화에 이병헌 감독 이름이 걸려 있으면 돈이 아깝지 않겠다, 라는 믿음으로 영화관으로 향할 것 같습니다. 그는 웃음을 사랑하는 감독이고, 저는 웃음이 좀 필요하거든요.
앞으로도 불륜영화 전문 리뷰어(!)로서, 좋은 불륜영화들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저는 불륜을 옹호하거나 지지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나온다고 따라하지 마세요. 영화에서 나온 문제들이 나한테도 있는 것 같다, 하시면 부부가 같이 영화를 보고 대화해 보세요. 열린 마음으로.
함께 나누고 싶은 좋은 불륜 영화(?)가 있으면 추천도 좀 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