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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자까 Dec 16. 2022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잔상으로 남는 장면이 있다

영화 <캐롤>

영화는 장면 속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함축해서 보여줍니다. 하나의 장면을 이루는 수많은 시각 요소들은 그 장면의 여운을 만들죠. 이렇게 장면에 등장인물과 다양한 시각 요소를 배치하는 것을 미장센(Mise-en-Scène)이라고 부릅니다. 대학 시절, 영화 <캐롤>의 미장센을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시각 요소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영화의 메시지가 더 깊게 와닿았고, 과제였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자연스럽게 이 영화가 떠오릅니다. <캐롤>은 시리면서도 포근한 겨울의 향을 온전히 담고 있는 대표적인 겨울 영화입니다. 종일 완연한 겨울이 왔다는 듯이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에 영화 <캐롤>을 다시 감상했습니다. 더불어 지난 몇 년간 묵혀두었던 글도 꺼내 봤습니다. 오랜만에 먼지 쌓인 글을 읽으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사실 이 글은 어떤 리뷰보다도 제게 소중합니다. 이 글을 시작으로 영화 리뷰의 세계에 발을 들였거든요. 이왕 꺼내 든 참에 이곳에도 기록해볼까 합니다. (지금의 형식에 맞춰 어쩔 수 없이 조금 뜯어고쳤지만, 과제로 제출했던 글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다소 미흡하더라도 미소를 머금고 너그러이 읽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캐롤
Carol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캐롤>은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인생에 단 한 번,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랑'을 만난 두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제게 잔상으로 남은 장면은 이혼 소송 중인 '캐롤'의 남편 '하지'의 협박으로 '캐롤'과 '테레즈'가 급히 뉴욕으로 돌아가는 차 안 장면입니다. 하필 두 사람이 여행지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직후에 벌어진 사건이었죠.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캐롤'의 양육권 분쟁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알기에 '테레즈'는 자기의 사랑을 자책합니다. '캐롤'은 차를 멈춰 세우고, 슬퍼하는 '테레즈'를 꼭 안아줍니다. 

이 장면 속의 시각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프레임을 가득 채운 자동차두 인물이죠. 마치 그들만의 세상을 형상화하듯, 자동차의 외부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소수자의 사랑을 소재로 하는 작품은 성 지향성에 혼란을 겪는 인물의 내적 갈등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캐롤>은 그러한 갈등을 전면에 드러내기보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데 집중합니다. 그들의 사랑을 유별나지 않은 것으로 묘사하기 위한 선택이었죠. 


그러나 자동차 안에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도록 배치한 시각 요소는 그들의 사랑이 아무리 유별나지 않은 것일지라도, 사회적으로는 인정받기 어려운 외로운 사랑임을 표현합니다. 영화의 배경인 1950년대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낮은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여성끼리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회에서 쉽게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죠. 따라서 이러한 장면 구성은 영화의 주제 의식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기 위한 정교한 프레임 디자인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위 장면에서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지배 요소는 마치 창틀처럼 보이는 자동차의 전면 유리입니다.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자동차의 유리창 프레임은 화면을 반으로 분할하는 구도를 형성하죠. 인물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오로지 자동차 안으로 한정된 상황에서도 '캐롤'은 자신이 있던 위치에서 '테레즈'가 앉은 조수석의 프레임으로 이동합니다. 


이러한 분할 구도와 인물의 이동은 두 인물의 성격 변화를 드러냅니다. 극의 초반, '테레즈'는 '캐롤'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능동적으로 반응하고, 솔직하게 행동하죠. 반면 '캐롤'은 그녀만큼 사랑에 적극적이지는 않습니다. 양육권 분쟁 중인 남편 '하지'와 연인으로 오해받을 만큼 돈독한 친구 사이인 '애비'의 존재 등으로 인해 '테레즈'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없죠. 하지만 이 장면을 기점으로 두 인물의 특성은 뒤바뀝니다. '테레즈'는 '캐롤'이 자신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는 생각에 더는 적극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선을 넘어 '테레즈'에게로 넘어간 '캐롤'은 안타까운 이별 이후에도 그녀에게 선뜻 먼저 다가가며 사랑의 시련을 극복하려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죠. 


조명도 눈여겨 볼만한 요소입니다. 자동차 내부에는 특별한 조명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흐릿한 유리창이 인물과 관객 사이를 갈라 두기까지 하죠. 우리는 두 사람이 껴안고 있는 것만 볼 수 있을 뿐, 그들의 표정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이는 현실의 한계에 부딪혀 사랑의 감정을 숨겨야만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어둡고 흐리게 묘사된 그들의 공간은 '테레즈'와 '캐롤'이 앞으로 겪어야 할 고비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또 원색을 사용하여 다채롭게 표현한 다른 장면들과 달리 이 장면에서만 유독 색상이 거의 빠져있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흑백에 가까운 화면 역시 그들의 사랑이 컬러에서 흑백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며 이별을 암시하죠. 


하지만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두 인물의 근접도는 긍정적인 기대를 유발합니다. 서로 껴안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공간이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근접성은 이별이라는 시련 속에서도 두 사람이 결국 용기를 가지고 그것을 극복해낼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극이 위기에서 절정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위치한 이 장면은 다양한 미장센을 통해 두 인물의 특성 변화, 관계에 대한 복선, 그리고 사회적 배경과 현실의 한계를 암시합니다. <캐롤>을 연출한 토드 헤인즈 감독은 이 작품을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격정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랑의 과정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감정의 희로애락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이끌되, 시각 소들의 배치와 표현으로 성소수자가 겪는 외롭고 고독한 상황을 은연중에 드러냈습니다. 주제 의식을 '보여주는' 훌륭한 영화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스무 살 언저리에 썼던 글인 만큼 다소 어설프고 미흡하지만, 꼭 한 번은 브런치에 이 글을 올리고 싶었습니다. 미장센이 뛰어난 영화는 이처럼 섬세한 시각 요소의 배치를 통해 오래도록 기억되는 장면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통해 영화 전체를 기억하도록 합니다이 글을 통해 여러분의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은 <캐롤>의 장면들, 또는 사랑해 마지않는 다른 영화들의 장면들이 떠오른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Summary 

1950년대 뉴욕, 맨해튼 백화점 점원인 테레즈(루니 마라)와 손님으로 찾아온 캐롤(케이트 블란쳇)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낀다. 하나뿐인 딸을 두고 이혼 소송 중인 캐롤과 헌신적인 남자친구가 있지만 확신이 없던 테레즈, 각자의 상황을 잊을 만큼 통제할 수 없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감정의 혼란 속에서 둘은 확신하게 된다. 인생의 마지막에, 그리고 처음으로 찾아온 진짜 사랑임을… (출처: 씨네21) 


Cast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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