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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메커니즘

독서의 맛

by 조이홍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지, 초등학교 아니고 국민학교 나온, 책 읽는 걸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책 없음 못 살아 정도는 아니고 책이 있어 삶이 더 풍요롭고 즐겁다, 라고 말할 정도는 됩니다. 요즘은 숏폼을 끊은 덕분에, 게다가 '쿵'하고 '헉' 하는 교통사고로 닷새나 입원한 덕분에 부쩍 독서 시간이 늘었습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톡' 건드리면 '팡' 하고 터질 것 같은 기분은 책이 주는 대체 불가능한 선물입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소설책을 읽으며 눈으로 글자를 따라갈 때면 거의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그 장면이 마치 영화처럼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너무 생생해 혹시 이 소설이 영화로 나왔던가 싶을 때도 많습니다. 단지 정보만을 전달하는 책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상상 메커니즘' 덕분에 소설책을 읽는 내내 지루하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정말 재미없는 책을 읽을 때면 아무리 상상 메커니즘이 작동한다고 해도 지루하고 졸릴 터입니다. 그런 소설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 아니라면, 중간에 내려놓으면 그만이니 여전히 '책=재미있는 것'이라는 공식이 유효합니다. 그런데 문득 궁금했습니다.


여러분도 소설책을 읽을 때 이런 상상 메커니즘이 작동하나요?


저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이전에는 한 번도 이런 질문을 품지 않았습니다. 비록 국민의 절반이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시대입니다만, 워낙 강력한 대체제(스마트폰)가 있으니까요. 도파민은 인내심이 없고, 스마트폰은 그런 도파민을 펌프질 하는데 타고난 재능을 가진 존재니까요. 책 읽지 않는 게 너무나 당연한 시대가 되었고, "책 좀 읽어."라는 말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듣기 싫은 잔소리 Top 10 안에 언제나 당당하게 순위를 올렸습니다. 하긴,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뇌과학자들이 독서가 얼마나 성장기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목이 터져라 외쳐대도 말입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왜 이런 질문이 떠오르게 된 걸까요.


제게는 아이 둘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림책에 파묻혀 살던 아이들이 자라서는 책 한 권 읽지 않습니다. '와, 저렇게 책 읽기 싫을까.' 싶다가 문득 이 질문이 떠오른 것입니다. 혹시 아이들은 나와 같은 '상상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래서 독서에서 재미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참, 부모의 마음이란 바다처럼 넓고 깊습니다.... 상상 메커니즘이 없다면, 그래서 책 읽기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고역일 테니 더 이상 책 읽으라고 강요하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사실 제가 읽고 감동받은 책들을 아이들한테 많이 추천해 주었거든요. 도서관에서도 늘 빌려다 주고....


문자는 인간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발명된 것이므로 우리 뇌의 진화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 우리의 뇌는 원시시대부터 ‘심상(mental imagery)’, 즉 보지 않아도 장면을 재구성하는 능력을 발달시켜 왔다고 합니다. 맹수의 그림자를 떠올리고, 사냥감을 쫓는 동선을 그리며, 아직 존재하지 않는 도구를 구상하는 일들은 생존과 직결되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누군가는 저처럼 상상 메커니즘을 작동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못할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인지적 다양성(개인이나 집단이 세상을 인식하고 사고하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인지적 특성과 관점의 차이)'입니다. 어떤 뇌는 이미지(그림이나 장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데 강하고, 어떤 뇌는 추상적 기호나 언어적 논리를 통해 더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조상이 집단에서 어떤 업무를 수행했느냐에 따라 성향이 달라졌을 터입니다. 전자가 예술과 신화를 낳았다면, 후자는 수학과 개념을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두 분야 모두 집단의 생존을 위해 필수였기에 인류는 두 가지 방식(적어도) 모두를 선택한 것입니다. 아,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제가 왜 그토록 수학 과목에 쩔쩔맸는지 '확' 이해됐습니다. 아, 이토록 강력한 진화의 굴레라니.


이 글을 읽고 '나는 후자에 해당하니 책쯤이야 안 읽어도 되겠다' 싶은 분은 없겠죠. 유전자가 아무리 강력하고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타적인 행동들도 해왔으니까요. 인간은 언제든 뮤턴트(돌연변이)가 될 가능성에 노출된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실 독서를 하지 않는 이유가 단지 진화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문자는 기나긴 인간의 역사에서 아주아주 최근 일이니까요. 어쩌면 아직 진짜 진짜 재미있는 책을 만나지 못해서, 그래서 책과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또 책 좀 읽지 않으면 어떤가요.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정보와 재미가 존재하는걸요. 서울에 사는 사람이 멀고 먼 땅끝마을 맛집에 안 가본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궁금하죠, 궁금하죠. 굳이 저 멀리 땅끝마을까지 가서 그 집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요. 얼마나 맛있으면 그럴까 궁금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독서의 맛도 그렇습니다. 궁금하면 지금 당장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장을 둘러보세요.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진짜 진짜 재미있는 책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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