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AI가 일을 가져가면, 남는 것은 결국 놀이다
일론 머스크는 인터뷰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AI가 모든 노동을 대체하는 세상이 오면, 인간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그 세상을 그는 'UHI(Universal High Income)'라고 불렀다. 보편적 고소득. 생존 걱정 없이 욕망을 따라가는 삶.
듣기에 좋은 말이다. 하지만 이 전제에는 슬그머니 건너뛴 지점이 있다.
기술이 노동을 대체할 수 있느냐는 기술의 문제다. 하지만 그 과실이 모두에게 분배되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역사를 보면, 생산성 혁명이 분배 혁명을 자동으로 만들어낸 적은 없다. 8시간 노동제는 기계가 준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이 싸워서 얻어낸 것이다.
머스크는 두 개의 명제를 하나인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 사이의 공백을 "그냥 될 거야"로 메웠다.
그렇다면 가정을 해보자. 분배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되어 UHI 세상이 온다고. 인간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게 될까.
문제는 욕망의 구조다.
우리는 흔히 욕망을 절대량의 문제로 이해한다. 충분히 가지면 만족할 것이라고. 하지만 욕망은 절대량이 아니라 상대적 위치에서 온다. 내 집이 100평이어도 이웃이 200평이면 불만이다. 내 연봉이 1억이어도 동료가 2억이면 박탈감을 느낀다.
경제학은 이걸 '지위재(positional goods)'라고 부른다. 물질적 희소성이 사라지면 인간은 새로운 희소성의 대상을 만들어낸다. 물질에서 관계로, 관계에서 서사로, 서사에서 존재 각인으로.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상이 바뀔 뿐이다.
게임 산업은 이미 이 원리를 실증하고 있다. 가챠와 한정 스킨은 기능이 아니다. 인공적으로 재생산된 희소성이다. 모두가 같은 캐릭터를 가질 수 있는 세상에서, 게임사들은 "당신만 가질 수 있는 것"을 판다.
UHI를 향해 가는 세상에서 게임 산업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진 않는다.
약해지는 것들이 있다. 노동 보상으로서의 여가 기능이다. 지금 많은 게임이 "바쁜 현대인의 스트레스 해소"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자동 사냥, 출석 보상, 패스 시스템. 내가 없어도 캐릭터가 자라는 구조. 이 게임들은 여가가 의무이던 시대의 산물이다. 일에서 해방되면 이 구조의 매력은 급격히 떨어진다.
강해지는 것들도 있다. 관계 형성의 밀도, 세계관의 깊이, 존재를 각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게임이 아니라, 내가 그 세계에 살았다는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게임.
이 맥락에서 하나의 장르가 특별히 눈에 띈다. '플레이어가 세계를 만드는 게임'이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매튜 볼의 게임 산업 리포트(2024)에는 충격적인 숫자가 하나 있다. 전 세계 게임 플레이 시간의 60~70%를 로블록스, 포트나이트, 마인크래프트 단 세 게임이 가져간다. 신작 게임들이 차지하는 시간은 6%에 불과하다. 이 세 게임의 공통점으로 흔히 '샌드박스'를 꼽는다.
하지만 이건 장르의 승리가 아니다.
로블록스는 게임이 아니라 게임을 만드는 플랫폼이다. 마인크래프트는 창작 도구다. 포트나이트는 시즌마다 세계관이 바뀌는 소셜 공간이다. 이 셋이 공유하는 건 '샌드박스'라는 장르 레이블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단순 소비자가 아니라 세계의 구성원으로 개입한다는 구조적 특성이다.
그 구조를 가장 극단적으로, 가장 오래 밀어붙인 게임이 이브 온라인이다.
2003년 출시된 이브 온라인은 여전히 운영 중이다.
이 게임에는 제작사가 쓴 스토리가 없다. 전쟁도, 경제도, 외교도 모두 플레이어가 만든다. 수천 명이 참가한 전투에서 수조 ISK 상당의 함선이 파괴되고, 그 전쟁의 원인을 추적하면 몇 달 전 한 플레이어의 배신이 나온다. 이 역사는 게임 밖 위키에 기록되고, 유튜브에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고, 언론 기사로 다뤄진다.
플레이어들이 단순히 게임을 하는 게 아니다. 역사를 만들고 있다.
이 구조가 UHI 세상의 욕망과 정확히 맞닿는다. 물질이 희소성을 잃으면 인간은 서사와 존재 각인을 원한다. 이브 온라인은 그걸 20년째 팔고 있다. 내가 이 세계에 존재했다는 것, 내 결정이 역사의 한 줄을 바꿨다는 것.
그렇다면 이브 온라인 모델이 미래 게임의 답일까.
여기서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이브 온라인과 가장 유사한 구조로 설계된 알비온 온라인의 현재를 보면 — 스팀 동시 접속자 약 5,800명, 2024년 최고치 대비 79% 하락이다. 이브 온라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26년 3월 현재 월간 플레이어 약 34,000명, 전월 대비 소폭 감소 추세를 유지하고 있다.
두 게임 모두 '느린 노화' 중이다.
원인을 파고들면 두 가지 구조적 문제가 나온다.
첫째, 신규 유저 진입 장벽이다. 플레이어가 만든 경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존 유저에게 유리해진다. 신규 유저는 수년간 쌓인 베테랑의 자본과 지식 앞에서 구조적으로 불리하다. 이브 온라인의 경우 "진입 장벽이 아니라 절벽"이라는 표현이 커뮤니티에서 20년째 반복되고 있다.
둘째,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플레이어가 세계를 만드는 게임은 구조적으로 실시간 시간 투자를 요구한다. 함대전에 중간에 이탈하면 동료에게 민폐다. 경제 활동도 꾸준한 접속 없이는 의미가 없다. 게임이 나에게 시간을 요구하는 구조다.
그런데 현대인의 시간은 점점 파편화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역설이 생긴다.
UHI 세상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더 깊은 존재 각인을 원한다. 내가 이 세계에 살았다는 흔적, 내 결정이 역사를 바꿨다는 경험. 이 욕망은 '플레이어가 세계를 만드는 게임'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한다.
동시에, 현대인은 시간을 뺏기기 싫다. 로블록스와 포트나이트가 전체 게임 플레이 시간의 60~70%를 가져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게임들의 공통점은 15분을 켜도 되고 3시간을 켜도 된다는 것이다. 세션 길이에 페널티가 없다.
깊이 있는 세계를 원하는 욕망과, 시간을 내주기 싫은 욕망. 이 두 가지가 충돌한다.
AI가 학습 장벽을 낮춰줄 수는 있다. 인게임 AI 가이드가 이브 온라인의 복잡한 경제를 실시간으로 설명해준다면 진입 허들은 낮아진다. 하지만 이건 공급 측 해결책이다. 진짜 문제는 수요 측에 있다. 현대인은 몰라서 이 게임을 안 하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시간을 쓰기 싫은 것이다.
지금까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한 게임이 없다.
깊게 만들면 신규가 진입하지 않는다. 쉽게 만들면 깊이가 사라진다. 이브 온라인은 깊이를 지키다가 틈새 장르로 남았다. 알비온 온라인은 진입 장벽을 낮추다가 강점이 희석됐다.
두 게임이 함께 보여주는 것은 이렇다.
'플레이어가 세계를 만드는 구조'는 UHI 세상이 원하는 욕망에 가장 가까운 게임 형태다. 존재를 각인하고, 역사를 만들고, 내가 없으면 빈자리가 생기는 세계. 하지만 이 구조가 현대인의 시간 패턴과 충돌한다는 문제를 아직 아무도 풀지 못했다.
가능성의 실마리는 하나다. 내가 10분 접속해서 한 결정이 — 내가 없는 동안에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다음에 접속했을 때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구조. 존재 각인은 되되, 실시간 시간을 담보로 잡지 않는 방식.
이걸 비동기 참여 구조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아직 이걸 제대로 구현한 게임은 없다.
"존재를 각인하고 싶다"는 욕망과 "시간을 뺏기기 싫다"는 욕망을 동시에 충족하는 게임 구조가 발명되는 날, 이 장르는 처음으로 틈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게임을 만들 조건이 — AI의 등장과 함께 — 처음으로 갖춰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