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설과 오백 원(하)
한반도문학 여름호 단편소설 #2/2
명석은 하루 외박 허가를 받고 나왔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명석이 우리를 반겼다. 그는 불과 두 달 남짓의 짧은 시간에 건장하고 믿음직한 대한의 남아로 거듭나 있었다. 학교 다닐 때의 부드러워 보이는 이미지가 싹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먼저 나에게 씩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은설을 포옹하였다. 그를 마주 안는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보였다. 나는 옆에서 그런 둘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부대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떨어진 읍내로 향했다. 우리는 한 고깃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명석의 무용담이 이어졌다. 그는 마치 전쟁터에서 크고 작은 전투라도 치른 듯, 훈련소와 배치받은 부대에서 겪은 결코 길지 않은 군생활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군대를 전혀 모르는 나와 은설에게는 그가 마치 역전의 용사처럼 느껴졌다. 밤늦게까지 술도 한잔 하며 회포를 푼 우리는 근처에 있는 모텔에서 묵기로 하였다. 그들 둘이 한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혼자 그들의 옆방에 들었다. 그날 나는 혼자 뒤척이며 이런저런 생각에 시달리면서 거의 날밤을 새웠다.
다음날 명석은 부대로 복귀하였고, 나와 은설은 전날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내려왔다. 시외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그러는 동안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기차가 종착역에 거의 도착할 무렵 이미 깜깜해진 창에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비쳤다. 은설이 흘리는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그녀의 눈물에 나는 마음이 아팠지만, 차마 그 이유를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우리가 탄 기차는 곧 종착역에 닿았고, 그녀와 나는 역에서 나와 아무 말없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입을 꼭 다문채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그녀가 저 앞에 자기가 탈 버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
"상철아, 고마워.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너랑 있으면 마음이 정말 편해. 잘 가!"
"그래, 우린 친구..."
그녀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서서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나는 말을 얼버무렸고 그녀가 탄 버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6.
내가 은설의 소식을 다시 들었을 때는 세월이 한참 지난 후였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 중견기업에 입사하여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날, 회사에 존경하는 전무님의 자녀 결혼 소식을 접하였다. 그때 청첩장에 적혀있는 이름 석 자, 정은설. 바로 그녀였다. 흔하지 않은 이름, 나이대로 보아 그녀일 가능성이 큰 이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군엘 갔다. 그리고 일병쯤 되었을 때, 다른 친구의 편지를 통해 명석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명석이 발목지뢰를 밟아 왼쪽 다리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폭우가 쏟아진 후, 전방 시야 확보를 위한 사계 작업이 있었다고 했다. 고참 병장으로 굳이 작업에 나서지 않아도 되는 명석이 자진해서 지원하였는데, 그만 빗물에 쓸려 내려온 발목지뢰를 밟았다고 했다. 급하게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이미 발목이 날아갔고 결국 무릎 밑부분을 잃었다고 하였다. 그 사고 이후 은설로부터의 연락이 끊겼다. 나에게 더 이상 편지나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내가 제대하고 학교에 다시 갔을 때, 명석이 졸업 후 어디 지방 도시로 가서 정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학교에 은설의 행방을 물을만한 사람은 없었다.
결혼식장에서 만난 은설의 모습은 그날의 주인공답게 너무 예쁘고 아름다웠다. 순백의 긴 드레스에 면사포를 쓴 그녀는 바로 천사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 옆에, 작달막한 키에 배가 불룩 나온 신랑이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연신 벙긋거리고 있었다. 그녀와 그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단지 신랑은 직업이 의사에 집이 아주 부자라고 하였다. '재수 없는 녀석!' 나는 신랑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은설이 신부입장을 하기 전 신부 대기실에 있을 때, 그녀를 찾은 나를 본 은설이 깜짝 놀랐다.
"어머, 상철아! 여기를 어떻게?"
"은설아, 결혼 축하해! 부디 행복하게 잘 살아."
나는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비록 나와 인연이 되지는 못하였지만, 첫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여자. 그런 그녀의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 건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그녀에 대한 순수한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례선생님 앞에 두 사람이 언밸런스 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을 보았을 때,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7.
세월이 흘러갔다. 그리고 그녀, 은설을 다시 만난 건 바로 전무님의 빈소에서였다. 몇 년 동안 지속된 불경기와 고금리 등 경기 여건의 악화로 회사가 점점 힘들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한 압박감이 경영진의 어깨를 짓눌렀고, 전무님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하여 무리한 일정을 마다하지 않고 해외 출장을 다녔다. 휴일에도 쉬지 않고 동분서주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다 결국 심장마비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전무님의 죽음은 직원들 모두를 크나큰 슬픔에 빠지게 하였다. 누구보다도 직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분이었고, 차기 사장이 될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던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직원들이 전무님의 빈소를 자발적으로 찾아 일손을 도왔다. 조를 나누어 밤낮을 지키며 손님을 맞았다. 마치 자신들의 가족상을 맞은 듯이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나도 그들 중에 끼어 있었다. 은설과의 관계도 관계지만 그보다도 전무님을 누구보다도 존경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빈소를 찾았던 첫날 문득 깨달은 게 있었다. 빈소에 표시된 상주 명단에 은설의 남편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작달막한 키에 배가 불룩 나온 재수 없는 녀석의 모습이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전무님의 발인이 있기 전날 밤, 은설이 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남편과 이혼하였다고 하였다. 결혼한 지 이 년 만에. 남편은 바람기가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남자라고 하였다. 명석이 떠나고 나서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하다가, 마치 도피처를 찾듯이 사귄 지 육 개월 만에 결혼하였고 부부로 이 년을 함께 했지만, 단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다고 하였다. 거기에 덧붙여 시댁 식구들의 성화에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남편의 바람기를 오히려 그녀 탓으로 돌렸다고 하였다. '여자가 내조를 잘해야지 그렇지 못하니까 남자가 밖으로 돌지.' 시어머니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은 후 그녀는 결심을 굳혔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결국 남편과 헤어졌다고 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둘 사이에 아이가 없어 마음 정리가 쉬웠다고 하였다.
그녀는 아빠의 죽음에도 자기 책임이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자기가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아빠의 마음이 조금은 편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런 그녀를 다독이며 내가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이 있고, 그건 남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전무님의 죽음은 결코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내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때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내가 오백 원짜리 동전을 집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난 가끔 그런 생각이 떠올라. 그때 내가 동전을 집을까, 지갑을 집을까 망설였거든. 평범하고 작은 것에도 소중한 가치가 있을 수 있는 건데 말이야."
"은설아, 너는 아직 젊어. 앞으로도 선택의 순간이 많이 있을 거야. 그럴 때 망설이지 말고 용기를 내서 선택을 해봐."
내가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였지만, 그것은 어쩌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과연 나는 용기를 내서 선택하였을까? 망설이지 않았을까? 비록 그녀가 명석의 짝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을 한 번쯤 표현했더라면 그녀와의 관계가 바뀌지는 않았을까? 내 마음을 숨기고 그냥 묻어버린 게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명석의 사고 이후 그녀로부터 온 편지에 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았었다. 두 번씩이나. 명석의 사고 소식에 난 큰 충격을 받았고, 그런 상황에서 은설과 소식을 주고받는다는 게 왠지 명석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편지에 그녀가 이렇게 적었었다.
"상철아 너 왜 날 피하니? 나 너무 슬퍼..."
8.
한 달쯤 지난 후, 나는 은설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아빠의 장례식 때 도와주어 고맙다고 주말에 밥을 사고 싶다고 하였다. 용기를 내어 내가 말했다.
"혹시 너 나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니?"
"흠, 좋을 대로 생각해!"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말했다. 좋을 대로 생각하라고? 그녀의 전화를 끊고 나는 가슴이 뛰었다. 은설을 만나다니. 그것도 단둘이. 그녀는 무슨 말을 할까? 또 옛날처럼 무슨 푸념 같은 것을 늘어놓지는 않겠지? 아니야! 그런 이야기는 이제 안들을 거야! 이제는 둘만의 이야기를 해야지. 너와 나의 이야기.
며칠 후, 나는 시내의 한 카페에서 은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였지만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나는 여유 있게 도착하여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얼마 후, 저 앞에 그녀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깨까지 닿을 듯한 까만 머리를 찰랑이며 연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딱 십 년 전,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과 똑같았다. 여전히 천사 같은 모습. 이제는 누가 누구를 선택하고 말고 가 없었다. 그녀가 오로지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주머니에서 오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녀에게 선택하라고 할 것이었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녀가 나를 선택했고, 우리는 짝이 되었고, 그래서 사귀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그려나가고 싶었다. 십 년이란 먼 길을 돌았지만, 다시 만난 길 그 끝에서.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