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어디로 갑니까…” ,영월이야기

-영화 속으로 걷다. 역사와 자연이 숨 쉬는 영월 힐링 여행

by 리즈








영월로 향하는 길은 마치 한 편의 서사시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이전의 영월 여행길과는 달리 천만을 훌쩍 넘는 관객들이 보았던 영화 속 장면들이 겹쳐 또 다른 감성을 돋게 한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강원도 영월을 단번에 친근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또한 천혜의 자연은 단순히 구경만 하는 풍경에 머물지 않고 누군가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울림을 주기도 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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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 나루터에도 봄이 왔고 조금씩 초여름으로 이르는 중이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갑니까…” 어린 왕 이홍위는 숙부 수양대군이 휘두른 권력에 하루아침에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길에 오른다. 단종의 애달픈 이야기가 깃든 청령포는 삼면이 강물로 빙 둘러싸인 채로 고요했다.


조선 6대 왕 단종은 조선시대 세종의 적장손이며 문종과 현덕왕후의 적장자다.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즉위하면서 숙부인 수양대군이 조선을 뒤흔드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강제로 실권을 빼앗긴다. 이후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성삼문, 박팽년 등의 사육신마저 처형당한다. 결국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다.


mck_69ae4258ae610.jpeg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청령포 나루터에서 단종 어가가 있는 곳까지는 몇 걸음 되지 않지만 나룻배를 타지 않으면 건널 수도, 빠져나올 수도 없다. 육지 속에 갇힌 섬 아닌 섬으로 완전하게 고립된 지형이다. 남한강의 지류인 서강이 굽이치면서 깎아 만들어진 지형으로, 유배지로 여간 혹독한 공간이 아닐 수 없다. 나룻배를 타고 애달픈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1~2분이면 충분하다.



단종 어가는 오래된 숲에 잠겨있다. 지금은 사람과 숲의 공존을 이루어 전국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수상했을 만큼 깊은 멋의 숲이다. 당시만 해도 첩첩산중이었을 이곳의 적막함을 짐작해 본다. 단종이 머물렀던 공간은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복원했고, 단종어소와 궁녀 및 관노들이 지내던 행랑채가 있다.


어가 담장에 특이하게 휘어진 나무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진다. 담장 밖에서 어소를 향해 거의 절반을 구부리고 절하고 있는 듯한 자세의 소나무다. 이제는 지지대까지 의지한 모습이다. 유배된 단종을 날마다 찾아와 담장 너머 문안을 드리던 영월 호장 엄흥도의 충절을 기려 엄흥도 소나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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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저편으로 또 한 그루의 잘생긴 소나무가 하늘 높이 뻗어있다. 600년 수령으로 추정되는 소나무인데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 중이다. 나무를 자세히 보면 한 그루지만 아랫부분부터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단종이 유배 생활 중 나무줄기 가운데 걸터앉아 한양 쪽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 나무라고 한다. 유배된 왕의 고독하고 처절한 생활과 애절한 울음소리를 보고 들었다 하여 관음송(觀音松)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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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송을 지나면서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다소 가파르고 높은 곳에 망향탑이 자리 잡았다. 청령포에서 유일하게 단종의 마지막 흔적이라고도 한다. 한양에 홀로 있을 정순왕후를 그리며 쌓은 돌탑이 있고 위쪽으로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낭떠러지 같은 험한 지형에 서니 어린 왕의 고립감이 절로 느껴진다. 망향탑에서 노산대로 이어지는데 해 질 무렵이면 이곳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단종의 모습도 그려보게 된다. 한양을 향한 슬픔과 그리움이 이 노산대의 투박한 돌무더기에 고여있는 듯하다.



단종의 회한이 서린 노산대를 내려와 걷던 숲길에서 금표비를 만난다. 단종 사후에 민간인 출입을 금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이 금표비 덕분에 청령포의 우수한 경관이 잘 보존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제는 현재로 소환된 조선왕 단종을 이야기하는 영화 한 편 덕분에 갑작스럽게 늘어난 방문객들이 청령포 숲 그늘을 오간다. 올해도 그 숲에 변함없이 봄이 찾아왔고 진달래가 만개했다. 청령포의 소나무 숲은 여전히 푸르다.




-단종을 기리다. 관풍헌 장릉

청령포에서 관풍헌과 장릉이 멀지 않다. 단종이 유배지 청령포에서 머물던 중 홍수가 크게 나서 강물이 범람하자 거처를 옮긴 곳이 영월 관아의 객사인 관풍헌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애달픈 삶을 마감했다. 마당 한쪽에 서 있는 자규루는 단종이 자주 누각에 올라 먼 데를 바라보며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달래던 곳이다. 이곳에서 지은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떠나온 뒤 외로운 홑 그림자 푸른 산중 헤매누나"로 시작되는 자규시(子規詩)는 지금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현재 영월 중앙로 자리 잡은 관풍헌 너른 마당엔 봄이 되어 풀이 자라고 노란 민들레가 봄볕을 받고 있었다. 참고로, 관풍헌 바로 맞은편으로 영화 '라디오스타'의 촬영지 청록다방이 보인다.


영월읍 단종로에 있는 장릉은 단종과 그의 삶을 지킨 분들을 기리는 공간이다. 단종 묘의 봉분을 모신 장릉은 비교적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아래에 단종역사관, 재실, 배식단사, 장판옥, 정자각, 홍살문 등이 세워져 있다. 단종이 생을 마감한 후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을 때 나서서 장례를 지낸 영월 호장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엄흥도 정려각도 볼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장릉의 잘 관리된 숲을 따라 산책하며 역사의 울림을 느껴보는 시간이 된다.




-적멸보궁이 있는 고찰, 법흥사

이제는 영월 읍내를 조금 벗어나 본다. 법흥사 가는 길가의 벚꽃이 눈부시다. 영월 사자산 골짜기를 옆으로 두고 달리다 보니 정말 깊은 산골이라는 게 느껴진다. 산속에 푹 파묻힌 채 올라가면서 세상을 벗어나는 기분이 든다. 영월 법흥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한 곳이다. 울창한 숲과 다양한 문화재를 볼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을 만나게 된다. 법흥사 일주문 맞은편으로 대한민국 100대 명품 숲이 있으니 절을 내려오면 꼭 둘러보는 것도 잊지 말일이다.


드디어 도착한 절 마당, 자동차를 주차하고 다시 걸어 올라가야 한다. 구불거리는 산길을 한참 걷다 보면 숲 내음이 상쾌하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연등이 줄을 잇는다. 전각 앞에선 봉우리를 터트린 목련이 환하게 반긴다.


영월군 무릉도원면의 사자산법흥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12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이 있어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산속의 전각마다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 길 끄트머리에 적멸보궁이 기다린다. 높은 산 속이지만 안정된 자세로 자리를 잡은 명당이 아닐 수 없다. 사자산의 웅장한 산세와 함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앞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을 전해 받는다. 고즈넉한 산사에서 마음껏 평온하다.




-시인의 마을에서 여유로운 한나절, 방랑 시인 김삿갓 마을

시간이 여유가 있다면 영월읍에서 조금 벗어나 방랑 시인 김삿갓 마을도 들러보는 것도 좋다. 청령포에서 30분 정도 달리면 시인의 마을이 나타나고 난고(蘭皐) 김삿갓문학관이 먼저 보인다. 우리에게 흔히 김삿갓으로 불리는 난고(蘭皐) 김병연은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笠翁)이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난고 김병연의 생애와 발자취와 시인의 풍류를 느껴본다.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다양한 김삿갓 관련 자료와 문학세계도 볼 수 있다. 해학과 재치와 풍류로 한세상을 살다 간 조선 후기 방랑 시인 김삿갓의 삶이 담긴 공간이다.


이뿐 아니라 이곳은 방랑시인 김삿갓 생가와 묘역 등의 문화유적과 김삿갓 주막거리를 비롯해 조선민화박물관, 묵산 미술관 등 다양한 문화 공간이 자리한 농촌 문화마을이다. 산세가 아름다운 김삿갓 계곡은 깊은 산속의 정취가 가득해서 요즘은 계곡 캠핑장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알아두면 좋은 정보를 더한다면, 김삿갓문학관에서 조금만 더 가면 경북 영주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영주의 고찰 부석사를 함께 여행하기도 한다. 경북 방향으로 살짝 더 나가보면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나왔던 금성대군을 떠올릴 만한 고치령이 나온다.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며 금성대군이 밀사를 통해 단종과 소식을 주고받으며 넘나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곳에 두 인물을 모신 산령각이 자리 잡고 있어서 역사적 의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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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역과 그 외 가볼 만한 곳

영월역으로 가는 길에 간이역인 연당역이 숨은 듯 보인다. 영월군을 지나가는 태백선의 쌍룡역과 청령포역 사이에 있는 연당역 주변으로 봄 벚꽃이 화사하다. 영월역 부근으로 들러볼 만한 소소한 곳이 제법 많다. 배우 최민수, 이세영 등이 출연했던 '모텔 캘리포니아' 촬영지의 모텔이 촬영 시의 간판 그대로 둔 채 영업 중이다. 월담 작은 도서관, 영월대교 등이 대부분 가까이에 있다. 안성기, 박중훈 배우의 영화 '라디오스타' 박물관도 한번 들러볼 만하다. 옛 KBS 건물인데 오르는 길에 충혼탑과 숲을 이룬 공원에서 잠시 쉼을 가져도 좋다. 영월향교도 그 옆으로 있다.


많은 여행자가 오가는 영월역 앞으로는 영월 맛집들이 즐비하다. 영월 곤드레밥집부터 특히 동강에서 잡힌다는 다슬기(올갱이) 해장국집들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유명세를 얻은 몇몇 집 앞으로는 사람들이 길게 줄 선 게 보인다. 그 거리에 유명한 콩국수 집도 있고 빵집, 그리고 옆으로 떡방앗간 등의 시장 골목이 이어진다. 그리고 맞은편으로 김삿갓이 우뚝 서 있는 고풍스러운 한옥 지붕의 영월역에서 영월 여행을 마무리한다.







https://youtu.be/9sxEZuJskvM?si=3atJK2oo6cY6Ve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