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의 파리 센강을 거쳐 노트르담 성당, 그리고 모네의 오랑주리 미술관
새벽의 파리는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숙소 주변을 걷고 소르본느 대학 둘레를 돌다 보니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가로등이 꺼지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며 여전하구나... 의 익숙함보다는 오히려 그새 낯설어서 짜릿하다. 스무 해가 훌쩍 넘어서 다시 온 파리에 이런 낯섦이 기다려주어 다행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뀐다는 세월이니 당연하고도 남는 일이다.
흔하게(?) 알려진 파리지만 이곳이 내게 낯선 땅은 분명하다. 그러나 파리는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수백 년 된 건물에 거뭇하게 묻은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딜 돌아보아도 역사의 흔적이 있다. 센강은 여전히 느리게 흐르고 있었고 퐁네프 다리도 더 깨끗하거나 새롭게 단장되지도 않았다. 센강 양쪽으로 오래된 옛 건물들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산천은 의구하되 나만 바뀌어 왔다.
김영하 작가의 글에
'한 번 간 곳을 또 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걸 볼 수 있어서가 아니다. 산천은 의구한데 오는 '나'만 바뀌어있다는 것, 내가 늙어간다는 것, 그런 달콤한 멜랑콜리에 젖어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시 가는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조라는 뜻일 것이다."
라고 김화영 선생님이 사석에서 말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린 두 아들 손 잡고 다녔던 파리에 이십 년 세월을 훌쩍 넘겨 늙어가는 내가 느릿느릿 걸으며 그런 달콤한 멜랑콜리에 젖어드는 건가. 어쨌든 다시 찾은 여행지의 맛을 느껴보는 중이다. 다만 그 옛날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제외했다. 물론 시간도 많지 않았다. 에펠탑은 강 건너 빌딩 사이로 멀리서 탑 끄트머리만 힐끗 쳐다보았다. 샹젤리제 거리나 루블 박물관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
센 강변엔 지나는 사람이 가끔 보였다.
강을 따라 파리의 찬 공기를 몸으로 느끼며 성당 쪽으로 걸었다.
노트르담 성당은 마침 미사 시간이어서 찬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그들처럼 기도하고 오르간 연주와 장엄한 노래를 들으며 예배에 함께 참여했다.
마음을 다해 찬송하는 표정이 마음을 저릿하게 한다. 높은 천장까지 울리는 오르간 연주와 신부님의 기도소리까지 온몸을 휩싸는 감동이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순박한 콰지모도가 치는 듯한 종소리를 들으며 고개 들어 종탑을 올려다본다. 에스메랄다의 물 한 모금 얻어 마시듯 성당의 성스러움을 온몸으로 받아서 밖으로 나오니 흐린 하늘에 바람이 불고 간간히 빗방울이 흩뿌린다.
비를 피하듯 지하철 역으로 얼른 뛰어 들어갔다.
도무지 이곳 사람들은 비가 오거나 말거나 걷는 속도는 여전하다. 비를 피할 생각이 없는 모습이다. 일상의 자연 속에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눈과 비도 함께 하듯.
노트르담 역에서 오르세 역까지는 10여분이다.
미술관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이 같은 방향으로 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가는 길에 강변의 가게에서 머플러를 하나 사서 둘렀다. 한결 온기를 준다.
오르세 미술관이 먼저 나타나는데 역시 예상한 대로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빗 속에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저 행렬에 서서 보낼 시간이 없다. 사실 애초에 두 개의 미술관 중에 오랑주리 미술관에 갈 생각이 더 컸었다. 클로드 모네의 필생 역작인 '수련 연작'을 다시 볼 생각이다.
이날은 하루 중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의 수련과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만 시간을 집중하기로 했다. 오르세 미술관은 오르세 역사(驛舍)를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한 곳이다. 규모도 크고 볼거리도 엄청나서 한나절을 다 보내야 한다. 그 옛날 그렇게 다리 아프도록 실컷 보았던 오르세 미술관이다.
오르세 미술관을 그냥 지나치고 사랑의 자물쇠가 빽빽이 걸려있는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가면 오랑주리 미술관이 있다. 근처에 다다르면서 익숙함의 안도가 생긴다. 그래, 여기쯤에서 잠깐 앉아있었지. 오래전 엄청 추웠었던 공원은 그대로군... 이런 생각을 하며 걷는 것도 김영하 작가의 글에서처럼 나만 변해서 다시 가는 여행의 달콤한 멜랑코리에 젖어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기분이 촉촉하다.
시간이란 게 참 별거 아니다.
스물몇 해전 꽁꽁 손이 얼던 겨울 속의 파리를 기억하는 것처럼 이제는 이렇게 촉촉했던 파리의 늦가을을 또 기억하게 되었다.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을 향하는 튈르리 정원을 지날 때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 계절을 물씬 느끼게 한다. 튈르리 궁전 정원 별채의 자연광이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의 수련 연작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 천정의 빛과 자연광이 날씨에 따라 또는 일출과 일몰에 따라 환상적이다가 몽환적이다가 하며 최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이다.
흐린 날에 찾아간 모네의 대작들은 조용히 그 자리에서 수련의 멋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직 자연의 빛을 찾아 그의 영혼을 불어넣은 수련 연작이 갤러리 내부에 가득 차 있다. 모네의 메시지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며 가슴 벅차게 그의 예술혼을 흐뭇하게 느껴볼 만한 시간이다.
-1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기념하여 모네가 작품을 기증하면서 요청한 조건이 있었다.
1. 작품을 시민에게 일반 공개할 것
2. 장식이 없는 하얀 공간을 통해 전시실로 입장할 수 있도록 할 것
3. 자연광 아래에서 감상하게 할 것
지하로 내려가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다닥다닥 전시되어 있다. 고풍스러운 액자도 눈길을 끈다. 모네, 마네, 모딜리아니, 피카소, 르누아르, 루소, 마티스, 위트릴로, 시슬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들의 맛을 실컷 느껴볼 수 있었다.
더 꼼꼼히 그림을 즐기기 위해 오디오 가이드가 있다. 그리고 가이드 투어를 이용하면 작품 이해에 도움이 크겠지만 자유롭게 보고 느끼는 것 또한 개인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또 한 가지는 지베르니에 위치한 모네의 정원을 들러볼 일이다. 그래야만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 작품과 연결해서 완전한 감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십 년 전에는 들렀었는데 이번에는 시간상 못 들렀으나 이곳은 언제라도 다시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오랑주리에서 눈을 들어보면 콩코드 광장도 보인다.
파리의 동선은 생각보다 길거나 힘들지 않다. 얼마든지 파리를 느끼며 걷기 좋다. 이 날처럼 비 오는 날의 여행은 감성지수를 자극한다.
미술관을 벗어나니 센강엔 파리지엔느들이 하나 둘 나와 걷고 있다.
바람 불거나 비가 오거나 햇살 좋은 어느 날 오후 미술관 정원을 거닐며 가끔 센강변을 거닐며 그렇게 여행자가 되는 파리 사람들, 센강을 배경으로 여행자처럼 사진을 찍는다. 내가 사는 곳에서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감성은 축복이다. 일상 속에서 즐기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발걸음은 풍경이다. 나는 어떤 여행 중인가.
여행이 끝났어요.
즐거움이 남아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제는 내가 파리와 모네의 정원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에펠탑은 어땠니?' 하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답니다.
'에펠탑은 볼 시간이 없었어.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을 봐야 했거든....'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모네의 정원에서 중에서~
http://bravo.etoday.co.kr/view/atc_view.php?varAtcId=107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