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속의 이야기 공간에서 하루

-제주 인문학 여행

by 리즈






여행 일정 중에 잠시 쉬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문득 속도를 늦추고 어디든 털썩 앉아 숨을 고르는 시간은 달콤하다. 주변의 소음이 적어지고 조용한 공간 속에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을 가져보는 시간, 제주는 생각보다 넓고 가볼 곳이 많다. 바다와 숲을 지나 오름을 걸으며 제주의 자연을 접하다가 인문과 기록의 조용한 공간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제주와 잘 어울리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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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으로 가면 조선 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예술을 만날 수 있는 추사관을 만나게 된다. 또한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를 즈음해서 달콤한 초콜릿을 주고받는 시기에 맞추어 가볼 만한 초콜릿박물관도 부근에 있다. 대정읍 동일리의 정난주 마리아 묘를 찾아 깊은 신앙의 역사를 품은 순교자 묘역에서 차분한 시간을 보내도 좋을 듯하다. 제주의 해안가를 달리며 푸른 바다의 상쾌함을 맛보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넓은 목장의 여유로움도 한껏 누리는 하루는 제주라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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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제주 추사관

추사관은 산방산이 저편으로 보이는 조용한 마을 속에 자리 잡았다. 볼거리 많은 중심지의 여행지보다 느릿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어슬렁어슬렁 마을 산책하듯 여유 부리며 걸어보다가 추사관으로 다가가니 낮은 돌담으로 길게 두른 전시관이 기품 있는 외관으로 맞아준다.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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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관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의 유배 시기를 중심으로 조성된 공간이다. 1980년대 정치적 사건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이 시기에 유배의 고독 속에서 예술혼을 피워낸 곳이다. 제주 추사관은 단순히 그의 업적을 내세우기보다는 유배의 시간 동안 한 인간이 남긴 사유의 시간과 예술세계를 보여주려는 듯 느껴진다.


일반적인 전시관을 떠올리자면 1.2층으로 올리고 지하층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추사관은 지하와 지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축가 승효상은 고민 끝에 모든 전시 시설을 지하로 보내고 땅 위에는 '집 형태'만 남기기로 했다. 완성된 건물을 보고 주민들은 감자창고가 들어섰다고 했을 만큼 단순하게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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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관 진입로 계단 역시 독특하다. 계단 사이로 지그재그 갈지자(之) 형 경사로를 두었다. 다소 가파른 경사는 추사의 절박함을 관람객도 조금이나마 느껴보라는 의미라고 한다. 경사진 계단을 통해 이동의 편의보다 추사의 유배 생활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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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관 1층은 추사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추사 영실이다. 달처럼 둥근 창문이 보이는 길을 통해 가면 추사 흉상을 볼 수 있다. 설치미술가 임옥상 님의 작품으로 험난한 역경의 세월을 딛고 보여준 예술혼을 무쇠의 질감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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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 전을 살펴보면 '추사의 세계'와 '추사와 제주'로 나누어 살펴보게 된다. 이곳에서 세한도(歲寒圖) 영인본을 볼 수 있다. 세한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추사의 최고 명작인 세한도는 추사가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귀중한 책들을 보내주는 제자인 역관 이상적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준 작품이다. 추사는 이곳 제주에서 그의 서체인 추사체를 완성했고 세한도를 그려내며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완성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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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밖으로 나오면 유배 시 살았던 초가 복원 집으로 곧바로 관람 동선이 이어진다. 낮은 초가지붕과 제주도 특유의 생활환경을 보여주는 집이다. 추사와 우정을 나누었다는 초의선사와 차를 마시는 조형물도 보인다 초의선사는 제주도에 내려와 6개월간 추사와 시간을 보내기도 하면서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전시관과 초가 앞의 너른 풀밭에 추사가 머물렀던 흔적을 담담히 들여다보며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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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관을 벗어나 건너편 안성리 마을 북쪽의 수월이 못도 잠깐 들러보자. 여름이면 연꽃이 뒤덮고 마름이나 수생식물들이 자라는 두 개의 작은 못으로 이루어진 수월이 못은 어느 기생 이야기가 담겨있다. 수월이라는 성질이 고약한 옛 기생이 세상을 떠난 후 마을 사람들이 그 집터를 연못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전설을 넘어 마을공동체의 역사이며 추억의 장소이기도 한 수월이 못은 계절마다 각기 다른 정취를 보여주는 운치 있는 쉼터 역할도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생태습지 탐방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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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대정성지, 정난주 마리아 묘

제주 올레길 11코스의 대정성지에 정난주 마리아 묘가 있다. 농사짓는 논밭을 지나다가 샛길로 들어가면 무관심 속에 자리 잡은 듯 인적이 드물고 한적하다. 입구에 아가를 안고 있는 정난주 마리아상이 자애롭다. 돌담 안으로 야자나무가 줄을 서고 제단 앞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눈앞에 있다. 순교자의 공간은 단순하고 단정하다. 성지의 정갈함과 함께 마음도 차분해진다. 외롭던 그녀의 삶처럼 하늘은 흐리고 돌담 옆의 채마밭엔 겨울 채소가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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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초, 정난주는 아버지는 정약현이고, 정약용은 작은아버지인 남양주에서 양반 가문 출신의 규수였다. 조선시대 일찍이 서학을 깨우친 정난주는 당시 16세에 과거급제하여 천재로 불리던 황사영과 결혼하여 천주교를 향한 갖은 탄압을 버텨낸다. 황사영 알렉시오는 북경 주교에게 밀서를 보내려다 능지처참당하고 정난주 마리아는 젖먹이 아들을 떼어놓고 제주의 관비로 37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 생활 중에도 신앙의 모범을 보여 한양 할머니라는 칭송받았고 그분의 묘는 일찍이 성지로 조성되었다. 남편을 잃고 아들을 떼어놓고 고되고 아픈 삶을 살았지만 정난주 순례길과 성당도 생겨나는 오늘날 그 발자취를 더듬는 여정은 감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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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초콜릿 박물관의 달콤함

제주 서부의 소소하고 알찬 여행지 중에 초콜릿박물관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거나 실내 활동이 필요할 때 더욱 그렇다. 서귀포 대정읍의 도로를 달리다 보면 세계 10대 박물관이라고 안내판이 붙은 철문을 만나게 된다. 붉은 돌로 이루어진 박물관 건물은 화산활동으로 생성된 제주 고유의 송이석이라고 한다. 유럽의 성처럼 이국적인 외관이 먼저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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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와 같은 날도 흔하다시피 즐기는 요즘이다 보니 이곳 초콜릿박물관 방문객이 늘어난 걸 본다. 아주 오래전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을 들렀었다. 그때는 너무나 한적하고 조용한 전시 공간을 둘러보는 것이 전부였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체험실에서는 초콜릿을 만드느라 즐겁고 전시 공간을 돌아보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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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초콜릿을 만들어 보는 초콜릿 사관학교 프로그램을 비롯해 초콜릿의 역사와 전래 과정, 갤러리 & 샵 등 공간마다 볼거리가 흥미진진하다. 초콜릿의 풍미를 직접 느끼는 시간, 초콜릿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부드럽고 달콤해지는 여행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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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해안과 성이시돌목장

제주 서쪽의 대정리 지역을 조금 벗어나 이제 자연 속으로 나가본다.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웅장함이 압도하는 절벽이나 커다란 산이 바다와 함께하는 걸 자주 본다. 제주 남서쪽 사계 해안은 해안도로 인근에 카페 등의 쉴 곳이 많아서 잠시 멈추어 볼 만하다. 주변에 용머리 해안도 있고 마라도를 향하는 유람선도 볼 수 있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 무렵의 일출과 일몰 시각의 산책은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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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달리든 제주는 평온한 자연이 거기 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며 여행의 즐거움을 더하는 곳, 성이시돌목장에선 드넓은 들판의 넉넉함이 있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푸근하고 풀밭에선 말들이 풀을 뜯고 있다. 초원 위로 우뚝 선 독특한 양식의 테쉬폰은 제주의 풍광에 한몫하는 신비로운 건축물이다. 화산 지대에 펼쳐진 초원에서 평화롭게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