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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슉 May 11. 2020

내게로 오다

[이모 말고 고모]

내게로 오다.     


2012년 8월, 나의 조카 승현이는 강력한 태풍 볼라벤과 함께 나에게 왔다.

드디어 나에게도 조카가 생겼다!!         

 



그날은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산후조리원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승현이를 만나러 가던 날이었다. 나는 비바람을 뚫고 승현이를 애타게 만나던 날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거센 비바람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강렬한 인상으로 내 머릿속에 승현이와 첫 만나던 날을 각인한 것은 전혀 다른 사건이었다. 그것은 바로 면접에서 떨어진 일이다. 면접 탈락이야 인생에서 무수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날이 특별히 더 각인된 이유는 내가 붙을 것이라고 자신했는데 처참한 결과를 받아보았기 때문이다. 면접장에서 나는 나보다 어린 지원자를 상대방으로 만났다. 면접을 진행하는 시간은 내가 합격할 것이라는 확신을 다지는 시간이었다. 그만큼 과장을 조금 보태면 상대방보다 내가 우월하다는 것은 틀림이 없어 보였다. 면접관들도 그것을 느끼는 눈빛이었다. 분명히 면접관의 질문에 대해 내가 더 대답도 잘했고, 상대방에 비해 경력도 더 좋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떨어졌다. 불합격의 결과를 받아 들고서, 낮에 나는 화장실에서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왠지 모를 억울함이 피어올랐다. 왜 나에게 그런 결과를 주었는지 이유를 따져 묻고 싶었다. 조직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적당한 나이의 남자 직원을 원했던 것 같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못난 것이 아니야, 그 회사와 내가 안 맞는 거야, 내가 너무 잘나 보여서 부담스러웠을 거야 등등 온갖 자아도취스러운 이유를 대면서 면접 탈락의 슬픔을 덮어버리려고 노력했다.           


당시 나는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니던 회사가 지방으로 이전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만나던 사람과 결혼을 할 것이라 예상했던 터라 먼 지역으로 이사할 수가 없어서 이직을 하려고 했다. 참 무던히도 애썼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원서를 쓰고, 연차 내서 면접을 보고... 이런 생활이 1년 넘도록 지속되자 나는 체력적으로 심리적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생활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막연함이 마음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에 모처럼만에 합격이라는 기대를 품었던 곳에서의 불합격 통보라 이전의 불합격보다 충격이 몇 배는 더 크게 다가왔다. 여기저기 푸른 잔디와 알록달록 꽃들로 장식된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이렇게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비포장 도로에 비가 억수로 쏟아진 뒤에 흙탕물이 고이고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밭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불합격의 장대비가 휩쓸고 지나간 내 머릿속은 흙탕물로 뒤덮여 버렸다. 요동치는 흙탕물을 고요히 진정시켜야 진흙과 맑은 물이 분리되는데, 내 가슴속에 고인 흙탕물은 점점 더 깊어져서 당분간은 헤어 나오기 힘들어 보였다. 이렇게나 심적으로 슬프고 고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하필이면 날씨도 최악이었다. 그해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태풍이 우리나라를 덮치고 도시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의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 거리에는 그야말로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 태풍은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여름이면 회자되는, 명성이 자자한 볼라벤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봄날의 밤이지만, 그 바람과 세찬 비가 생생히 느껴지는 것 같다. 태풍 볼라벤은 2012년에 우리나라를 덮친 태풍 중에서 피해를 가장 많이 남긴 태풍이었다고 한다.  


나의 탈락에 하늘도 분노하는구나 싶었다. 앞이 안 보이도록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만큼이나 내 기분도 우중충했다. 그렇지만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던 날이었다. 아니, 하소연 한 뒤에 돌아올 상투적인 위로의 말들이 어떤 것들인지 그동안 충분히 들어왔기에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에 없는 위로와 응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아마 내가 느낀 쓰디쓴 느낌을 그 누구도 고스란히 같이 느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퇴근 후 물 먹은 솜처럼 방 침대에 축 늘어져 있는데, 마침 오빠가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신발도 벗지 않은 오빠를 붙잡고 무작정 승현이가 있는 산후조리원으로 가자고 졸랐다. 사실 그즈음은 병원에서 산후조리원으로 옮긴 지 하루 이틀 정도밖에 되지 않아 산후조리원에서는 면회가 아예 되지 않았다. 게다가 태풍이 거세 산후조리원에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찬바람이 들거나 나쁜 세균을 더 옮겨올까 싶어 아빠들의 면회도 금지하던 터였다. 그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는 그동안 오빠가 어설프게 찍어온 핸드폰 사진으로만, 혹은 병원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만 승현이를 보았기에 실물을 간절히 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병원을 나와 산후조리원에 가기만 하면 아무 때나 승현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지금 가면 면회가 안 돼. 산후조리원으로 못 들어갈걸. 아마도 밖에서 얼굴만 볼 수 있을 거야.”

“그래도 가고 싶어. 못 들어가는 게 확실한 건 아니잖아. 가서 한번 보고 오자.”          


면회가 안되더라도 실망하지 말라는 오빠의 당부를 대충 귓등에 걸쳐놓고는 오빠를 재촉해 비바람 속으로 들어갔다. 그 비바람을 뚫고, 거리에 한 대도 보이지 않던 택시를 겨우 잡아타고, 승현이를 만나러 간다.     


새언니는 우리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이런 날씨에 왜 무리를 하냐고 했다. 오빠의 예상대로 우리는 정말 산후조리원 입구에서 신발 한 짝 벗지도 못하고 유리문 밖에서 눈을 꼭 감고 자고 있는 승현이를 보기만 했다. 눈을 꼭 감고 입을 앙 다물고는 이불에 꽁꽁 싸여있는 모습이 마치 누에고치 같았다. 자면서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마치 나에게 뭐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이런 날씨에 왜 왔냐고 하는 거였나?          


나는 산후조리원 입구에서 겨우 5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의 상견례를 마치고 나왔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밖은 비바람이 더욱 거세져서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게 되었다. 한 아름도 넘는 큰 가로수 뒤에 숨어도 그 나무가 뽑혀 나갈 것 같았다. 우산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산후조리원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집에 돌아오는 택시도 겨우 잡았다. 기사님이 이런 날씨에 외출을 한 것에 대해 의아해할 정도였다.(사실 나도 그런 날씨에 택시 영업을 하신 기사님을 의아하게 여기긴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돌아가는 길이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몰아치는 비바람을 뚫고 산후조리원에 가던 고단함은 이미 오래전에 잊혔다. 왠지 가슴이 뛰고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미소가 지어지고 앞으로 이 녀석과의 시간들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멋진 고모의 모습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이 녀석은 낮시간 내내 나를 힘들게 했던 불합격의 아픔을 말끔히 잊게 해 준 효과 좋은 진통제였다.          


8살 가족소개 숙제에 쓴 고모의 특징. 승현이 눈에 나는 23살로 보이나보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승현이가 나에게 와준 2012년은 유난히 태풍이 많아서 1960년대 이후로 드물게 여름에 4개의 태풍이 한반도를 덮친 해였다고 한다. 나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태풍의 개수만큼이나 길이길이 기억에 남을 여름이었다.  


태풍이 휘몰아치던 우리의 그해 여름,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강렬했다.
지금도 우리의 시간은 강렬하다.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도 그러하겠지.





승현이와의 에피소드를 하나의 매거진으로 엮어보려 한다.

그 첫 스타트는 역시 승현이와의 첫 대면일.

강렬하게 남아있는 그날을 이렇게 글로 적어보니 다시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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