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드시옵소서.
나이 먹은 티가 나는 엄마한테 좀 미안한지. 아님, 안쓰러운지. 여하튼 요즘 '뜻을 세우는 입지'라는 연령을 넘긴 딸의 버전은 익살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약통을 가져와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 자 드시옵소서.
그때마다 저녁에 콜레스테롤 약 한 알씩 먹는 걸 까먹지 않으려고 결심을 하곤 했는데도, 두 가지 다 매번, 거짓말처럼 까먹고 말았다. 절반은 안 먹어서 한 달 치 약이 두 달씩 갔다.
차라리 결심을 안 하는 게 나았으려나. 아니 그래도 끝까지 노력해 보자. 희망을 잃으면 생명도 끝난다니까.
딸은 어느 날 이걸 사들고 왔다.
엄마, 안 되겠어, 여기에 밤과 낮으로 채워놓고 꼭꼭 챙겨 먹어 알았지. 콜레스테롤 높아지면 뇌졸중, 심근경색이 올 수도 있어.
첫날은 딸이 여기에 약을 채워 넣어 시범을 보여주었다. 무릎 아픈 데 먹는 영양제, 피시오일이랑 우리 동네 의사가 처방해 준 콜레스테롤약, 머리로는 심플한데 아직은 저녁밥 챙기듯 습관이 안 붙는다.
시간이 가면서 딸한테 위풍당당을 고수하기 위해서라도, 점점 나의 기억력이 돋아나긴 한다. 나도 자존심이 있지.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을 훨씬 넘어,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든 걸 다 이해할 수 있다는 이순'도 지났으니.
두 번째,
오늘은 팬트리 정리할래요.
딸은 이번 쉬는 날 부엌 팬트리를 정리했다. 두어 달 전부터 그녀가 하고 싶어? 하던 일이다. 난 극구만류해 왔다. 부엌살림 정리는 나의 것이라고, 나만의 질서가 있는 엄마 고유 시스템이라고, 건드리지 말라고 해왔었다.
이번에 그녀가 노는 4일 간 계속 비가 내렸다. 날씨까지 선선했으니, 집안살림 정리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뒤죽박죽, 그러나 내 범주에 있던 팬트리가 딸의 손끝에 의해서 몰라보게 깔끔해졌다.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내가 거머쥐고 있던 부엌살림이 세대교체 되는 건 아니겠지?
세 번째,
내일은 치~즈를 드시옵소서.
노노, 난 치즈 소화 안 돼서 안 먹어.
근데 왜 샀어, 엄마. ㅎ
맞다, 참, 그저께 치즈 샀지. 내일 아침에 쌀과자에 얹어 먹어야겠다. ㅋ
매일 피시오일을 챙겨 먹었는데도 연일 내린 비탓인지, 앉을 때 무릎이 쑤셔서 칼슘이 들었다는 치즈를 사 왔던 거다. 그걸 또 깜빡했던 거다. 매일 행하는 루틴이 아니라 '가끔' 행하는 건 , 마치 없었던 그림자처럼,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기 일쑤다.
크지도 않은 냉장고 속에 야채, 과일이 든 걸 잊고 안 먹는 일도 자주 발생한다. 밤에 마실 물컵을 방으로 들고 간다는 게, 부엌에 둔 것도 모른 채 하룻밤을 그냥 보내기도 한다.
이 나이엔, 뭔가 새로운 걸 하려는 인풋보다는, 내 안에 이미 들어있는 걸 다독다독 살펴야겠다. 가볍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