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의 혁명' <무진기행> 김승옥 작가와의 만남2
“작가는 자유로워야 한다. 지나치게 관습을 존중해서는 안 된다.”
김승옥 작가의 말이다.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재능 있는 영화감독이자 각본가였으며 유머 넘치는 만화가였다. 전문적인 각색가와 시나리오 작가가 없었던 6, 70년대 당시 그는 영화인으로서도 많은 성과를 남겼다. 각색과 감독까지 맡은 김동인의 <감자>로 로카르노 영화제에 초대되었고, 1968년에는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을 각색해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나리오로 <영자의 전성시대>를 꼽았고, 이 외에도 <겨울여자>, <도시로 간 처녀> 등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아내의 반대로 영화감독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는 원고를 쓰는 것만 가지고는 당장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월간잡지 <샘터사>의 편집부장으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생계를 마주한 이상과 현실에 대한 고민은 가난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역사는 대학교 신입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외를 하며 어렵게 서울 생활을 했던 그는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앞으로 자신이 그린 만화를 보내면서, ‘연재만화가 결정되지 않았으면 나에게 그리게 해주십시오.’라며 뜬금없는 부탁을 했는데 그것이 채택된 것이다.
김승옥은 김이구라는 필명으로, 1960년 가을부터 <파고다 영감>이라는 4단 시사만화를 연재한다. 신춘문예가 당선되기 2년 전 이었으니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펼쳐 보인 것은 소설이 아니라 만화였던 것이다. 시작은 생계를 위한 것이었지만 만화와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에서도 독보적인 스타일을 완성해나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은 작가 김승옥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대표작, 바로 <무진기행>이다.
“소설 <무진기행>은 선생님의 이야기인가요?”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순천’이라고 적고 뒤를 이어나간다.
‘순천 - 무진기행 - 진짜 - 술집, 초여름, 자살’
‘순천 - 무진기행 (김승옥) - ① 술집 자살 ② 친구 교사 (여자) ③ 친구들 (어둡던 청년들)’
<작가와 함께 대화로 읽는 김승옥, 무진기행>을 통해 작가는 1964년 6월, 순천에서 소설과 비슷한 경험을 했고 그것이 글을 쓰는데 바탕이 됐다고 했다. 소설에서 이름만 등장하는 ‘희’는 결혼까지 생각했던 실제 여성이고, ‘하인숙’ 역시 음대를 졸업하고 순천고의 신입 음악교사로 부임했던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설의 줄거리 전환의 큰 기폭제를 하는 방죽길에서 마주친 여인의 시체 또한 당시의 기억을 빌러 온 것이다.
작품 속 주인공인 ‘나’는 현실에 잘 적응했지만 그곳에 찌들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중년의 남자는 앞만 보고 달렸던 지난날의 허무함을 무진에서 위로받고자 했다. 어쩌면 무진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들의 도시이자 현실에 쫓겨 달아난 이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오래전 인터뷰에서 누군가 ‘무진’의 의미에 묻자, 그가 짧게 남긴 한 마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무진이 있다.”
김승옥 작가를 만나기 전에 작품은 물론, 인터뷰, 대담 등 그와 관련한 많은 자료들을 보았다. 다행인 것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유머와 웃음을 잃지 않았고, 예전 인터뷰에서보다 훨씬 더 말을 잘 했다는 것이다. 직접 글을 쓰는데도 큰 불편함이 없었다. 작가로서 말을 잃어버린 그 힘든 시간을 견뎌내며 지금도 끈임 없이 노력하는 노 작가에게 경외감을 느꼈다.
김승옥 작가가 살아온 시대는 과연 어떠했을까. 그의 작품 속에서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저는 <서울 1964년 겨울>을 참 좋아합니다...”
질문을 다 듣기도 전에 펜을 쥔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1950 - 1970 전쟁, 가난!’
<서울 1964년 겨울>에는 밤마다 할 일 없이 방황하며 술집에서 처음 만난 남자와 무의미한 농담을 주고받는 작품 속의 ‘나’. 똑똑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 대학원생,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자책하고 자살을 택한 남자가 등장한다. 별다를 것 없는 군상들을 통해 작가는 오래전 비참하고 차가웠던 시대를 잘 보여준다.
사실 김승옥 말고도 암울한 시대에서 나타나는 절망과 좌절을 표현한 소설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의 소설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 것은 김승옥 소설이 갖고 있는 뛰어난 감수성과 감각적인 문체, 그리고 시대를 관통하는 절망과 이상향을 탁월하게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마주한 지 3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그렇다면 2016년, 지금의 김승옥은?
‘뇌졸증 -> 친구들 ×, 여행 ×’
김승옥 작가는 1999년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소설 창작 전공) 교수로 부임했지만, 2003년 오랜 친구 이문구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에 가는 길에 뇌졸중은 소리 없이 그를 찾아왔다. 당시 왼쪽 뇌의 3분의 2가 기능을 상실했고 하필 언어를 담당하는 기관의 손실로 말을 잃었다. 다행인 것은 현재 대부분의 말을 다 알아듣고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월화수 - 서울, 목금토일 - 순천, TV, 책, 컴퓨터’
근황을 물으니 자신의 이름을 딴 순천문학관에서 TV와 책을 보고, 컴퓨터로 원고 작업도 한다고 했다. 2009년에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 서정인 (순천고 4회, 서울대 영문과)과 김승옥, 두 작가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순천고등학교 교정에 문학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앞으로 선생님의 목표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앞으로의 김승옥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전과는 다르게 ‘혹시’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혹시 2020년 즈음에는 말과 글 쓰는 것이 어느 정도 돌아오지 않을까’, ‘혹시 80세 즈음에 스리랑카로 선교활동을 떠나지 않을까’, ‘혹시’라고 했지만 그의 계획은 분명해 보였다.
‘미래, 소설가와 선교사’
‘말과 글 × 그림 ○’
더불어 그림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어쩌면 뱉어내기 힘든 말과 글보다 그림이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반대로 그가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어왔다. ‘부모님은 아직 순천에 계시는지’, ‘어떤 드라마를 쓰는지’, ‘형제는 어떻게 되는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질문이었지만 철없는 젊은 작가에 대한 김승옥 작가의 속 깊은 배려임을 잘 안다.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내가 준비한 마지막 질문.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글쓰기란 타고나는 것인가요, 아니면 노력의 결과물인가요?”
옅은 미소를 보이며 본인의 수첩에다 뭔가를 적으려고 했지만 결국 수첩은 다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대답이 너무 궁금했으나 더 물어볼 수는 없었다.
카페를 나와 나란히 걷는 대학로. 높은 건물들과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많이 변했다는 손짓을 한다. 그러면서 대학로 구석에 있는 오래된 갈비탕집을 보면서는 ‘순천 명품관 식당’의 맛이 난다며 자주 찾는다고도 했다. 같이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겠느냐는 부탁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마로니에 공원으로 갈까요?”
그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니 혜화역 전철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와! 정말 저 디테일이란...’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혜화역 앞에서 사진을 찍고 나서 김승옥 작가는 큼지막한 손으로 먼저 악수를 건네 왔다. 악수를 청하는 손은 또 왜 그렇게 따뜻한지.
소설가 주인석을 비롯해서 김승옥과 함께한 사람들은 그와의 만남 뒤에 ‘이건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살아서 그를 만나게 되다니!’라고 외쳤다. 1964년 서울의 겨울을 지나 2016년 서울의 겨울을 걷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꿈은 아니겠지!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정말 김승옥을 만나다니!’
군중 속으로 스며들어 더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 나는 한 가지 생각이 더 들었다. 만약 당신이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면 그 따뜻한 손으로 악수를 건네면서 이런 말을 했을 것만 같았다.
‘젊은 친구, 이제 앞으로는 자네들의 몫이야...’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순천, 그리고 순천사람들 2] ‘동심이 세상을 구원한다’ 이해인 수녀가 기억하는 <오세암>, <초승달과 밤배>의 작가 정채봉 편에서 계속됩니다. 이해인 수녀에게 직접 듣는 동화작가, 샘터 편집자, 인간으로서의 정채봉 이야기를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