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탑 노트
'오전 6시 57분.'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눈을 뜬다. 피곤할 땐 꼭 잠에서 일찍 깨는 법이다.
베게에 코를 댄다. 숨을 깊고 천천히 들이마신다. 엄마의 젖을 찾는 아이처럼 혹시나 남아있을 냄새를 찾는다. 하지만, 섬유유연제 향이 아쉬울 만큼만 남아있을 뿐이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그녀는 이 집을 떠나기 전 자신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려고 애를 썼다. 하나도 남김없이. 베게며 이불이며 자신이 닿았던 모든 곳에 그야말로 완벽히 자취를 없앴다. 침대 밑, 소파 쿠션 틈에 손을 넣고 훑어봐도 머리카락 하나 남아 있질 않았다.
'오전 7시 3분.'
혼자 맞는 주말이다. 그대로 누워있고 싶다. 숨을 깊게 내뱉는다. 다시 잠을 청해보지만 몸과 정신은 이미 현실로 돌아왔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 우리는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이따금 섹스와 집 앞 호수를 거니는 일 외에 몸을 쓰는 일도 없었다. 우린 적어도 그게 불편한 관계는 아니었다. 나는 그랬다. 이 일로 불평을 늘어놓거나 다투지도 않았다.
사실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그녀와 관련한 사소한 것들을 떠올리려 노력해보지만, 잔상만 남아 흐릿하다. 꼭 환영이 서로 겹친 모습이랄까. 단 하나, 뒷짐을 지고 창밖을 보는 그 뒷모습만이 오래된 레코드 판 재킷처럼 음울하게 기억될 뿐이다.
아, 하나 더 있다. 이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쓰던 향수 냄새. D사 P제품. 눈을 감고 그 냄새를 맡으면 언제나 안개가 자욱한 숲속에 사슴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보고 선 형상이 떠올랐다. 마치 기시감처럼 말이다. 곧이어 사슴은 어디선가 나타난 프레스에 깔린다. 그것도 무척이나 부드럽게, 레가토. 프레스가 모든 동작을 끝내고 다시 사라지면 사슴이 있던 자리엔 향수병이 딱 놓여있는 걸로 상상은 끝맺음.
향수 냄새는 그녀와 참 잘 어울렸다. 그녀만의 특징이자 매력이었다. 이후 같은 향수를 쓰는 여자들을 종종 봤지만, 그녀만큼 어울리진 않았다. 그녀가 떠난 후 같은 제품을 구입해볼까, 하는 진상짓도 고민했지만 금새 포기했다.
그런다고 그녀가 돌아오지는 않으니까.
평소보다 늦은 귀가.
잘 아는 어느 기업 홍보팀장과 술자리를 하고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큰길에 택시를 세우고 좀 걸었다. 이대로 들어가면 잠이 오질 않을 듯 했다. 그러곤 집 근처 편의점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담배를 살까.'
이유없이 담배가 사고 싶어졌다. 그렇게 고민을 하면서 몸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나참. 그 순간 편의점에서 나오는 여자와 아슬하게 부딪힐 뻔 했다. 억하고 놀란 듯 비켜서는데, 여자에게서 그녀가 쓰던 향수 냄새가 났다. 인상이 쓰일 정도로 강하게.
계산을 하고 나와 포장을 뜯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어지는 동작으로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았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라이터를 다시 사려고 들어가기가 무색해졌다. 입에 문 담배를 그대로 귀에 꽂고 집으로 향했다.
골목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는 여자가 보였다. 아까 그 여자다. 짜증날 정도로 짙은 향수 냄새. 구역질이 날 정도다.
걸음을 재촉했다. 여자는 가로등에 기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고 있다는 걸 모르는 듯 했다. 손바닥으로 여자를 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싶다. 여튼, 여자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여자가 들고 있던 핸드백을 뒤졌다. 왜 그랬을까. 뭔가 찾고 싶은 게 있었던 것 같다. 맞다, 향수병이 있었다. D사 P제품. 그녀가 쓰던 향수.
쓰러졌던 여자가 천천히 일어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여자의 얼굴을 보지 못 했다. 나는 손에 쥔 향수병을 그대로 여자의 머리를 향해 내려쳤다. 손에서 향수병이 미끄러져 바닥에 툭 하는 파열음과 함께 떨어졌다. 여자도 바닥에 쓰러졌다.
이번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깨진 향수병에서 액체가 흘러내리는 걸 보고선 그대로 집으로 내달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집은 컴컴했다. 당연히 나를 반기는 건 없었다. 신발장 앞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아버렸다. 손을 씻고 싶다는 충동이 음습했다. 향수 냄새가 여자가 쓰러진 곳에서 부터 나 추적하 듯 따라오는 것 같단 생각으로 가득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작고 빨간 불빛이 깜빡였다. 전화기다. 음성메시지가 있다는 전화기의 몸짓. 바닥을 기어서 버튼을 누르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삐-'하는 알림음 뒤 침묵.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잠시후 나온 목소리.
"오늘 집으로 찾아 갈게요."
그녀다.
전화기가 '삐-'하고는 메시지가 끝났음을 알렸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 조금 전 골목에서 만난 여자를 떠올렸다.
창 밖은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