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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Jun 01. 2023

베네치아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여행은 언제나 놀라운 처음을 선사한다. 오월의 어느 햇살 좋은 날, 베네치아 본섬으로 들어가는 배 위에서 나는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압도당한 채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바닷속에서 불쑥 솟은 듯 웅장하고 화려한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대운하를 따라 양옆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마치 무도복을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이 매끈한 발목은 물속에 담근 채 우아하게 손 흔드는 모습처럼 낯설고 아름다운 환대였다.    

 

 우리 가족을 태운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자 현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럽의 응접실’이라 불리는 산마르코 광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입담 좋은 그는 베네치아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해 주었다. 5세기경 고트족과 훈족 등 이민족의 침략을 피해 습지대인 이곳으로 이주해 온 난민들에 의해 개척된 도시. 그들은 살기 위해 갯벌 아래 단단한 층까지 통나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건물을 세웠다. 엄청난 끈기와 눈물, 시련으로 개척한 도시가 아닐 수 없다. 이후 베네치아는 무역을 통해 지중해를 주름잡는 해상 공화국으로 성장하며 화려한 문화와 그에 맞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우며 매혹적인 물의 도시로 거듭났다. 베네치아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놀랍고 흥미로웠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산마르코 광장으로 가는 길,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는 작은 다리와 그 아래 관광객을 태우고 유유히 지나다니는 곤돌라의 모습이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하얀 다리의 이름이 ‘탄식의 다리’라는 것을 알고 나니 낭만은 사라졌다. 그 옛날 두칼레궁에서 재판받고 수감 되기 위해 지나야 했던 다리, 죄수는 좁은 창으로 아름다운 베네치아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보며 비탄에 젖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멋져 보이는 겉모습과 속사정은 다를 수 있음을 생각하며 조금 더 걸어 나가자 목적지인 광장에 도착했다.


 산마르코 광장은 공간 자체가 잘 빚어진 예술품 같았다. 마치 출입문처럼 세워진 두 개의 기둥에는 복음사가(福音史家) 마르코를 상징하는 날개 있는 사자상과 성 테오도로의 동상이 있고 기둥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오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간을 알려주고 있는 시계탑(토레 델 오롤로지오)이 보였다. 시계탑 옆으로는 산마르코 대성당과 두칼레 궁전이, 그 반대편엔 높이 98.6 미터의 종탑과 길게 이어진 고풍스러운 건물이 도열해 있어 운치를 더했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을 걷고 있으니 내가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된 듯했다. 아쉬운 것은 궁전, 성당, 종탑 모두 내부 입장이 가능한데 우리는 패키지여행으로 시간이 부족해 내부 관람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벽과 천장을 황금 모자이크로 장식했다는 산마르코 대성당의 내부가 얼마나 화려하고 기품있을까 상상만으로 만족하고 우리는 곤돌라를 타러 선착장으로 갔다. 


 곤돌라는 118개의 섬과 117개 다리 사이를 누비며 사람과 생활 물자를 실어 나르는 이곳의 교통수단인데 지금은 주로 관광용으로 쓰인다. 우리는 검은색 곤돌라를 타고 마을로 들어갔다. 건물들 사이사이 관광객들이 오가는 다리 밑 좁은 수로를 곤돌라는 나름의 질서로 움직였다. 고풍스러운 다리에 서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 노상 카페에서 커피 마시다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는 사람들로 이곳에선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곤돌라에서 내리자 한 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아이들은 빽빽하게 들어찬 골목 상점에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궁금하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화려한 유리 장식품 가게와 맛있어 보이는 초콜릿이나 사탕 가게가 아이들을 유혹했다. 다양한 가면으로 벽면과 천장을 빈틈없이 메운 가게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며 이곳이 가면 축제의 명소임을 실감 나게 했다. 아이들은 무도회 가면 자석과 유리 팔찌, 사탕을 사고는 베네치아 최고의 젤라토를 찾아야 한다며 가게 서칭에 열을 올렸다. 남편은 나에게 아이들은 1일 1 젤라토, 우리는 1일 1 에스프레소를 마셔야 하니 카페를 검색해 보라고 했다. 찾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가야 할 카페는 정해져 있었다. 베네치아의 꽃다방이라 불리는 유럽 최초의 카페 플로리안.    

 

 “플로리안 카페 가야지? 가이드가 괴테. 바그너, 카사노바 등 유명인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은 카페라고 추천했잖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카페라고도 했고.”

 “뭐? 가이드 말을 좀 제대로 들어. 거긴 유럽에서 커피값이 제일 비싸니 주변에 가성비 좋은 카페를 찾아 커피 마시면 된다고 했잖아.”

 “나도 제대로 들었거든! 그런데 플로리안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문화와 역사, 추억을 마시는 거라고.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니 꼭 들러보라고도 했잖아.”

 “안 돼. 곤란해. 곤돌라 체험비에 수상택시도 타야 하는데 선택 관광에 여행비가 많이 들었단 말이야. 할 수 있는 체험은 하는 게 맞지만, 2만 원 가까이하는 커피를 꼭 마셔야 해? 에스프레소 맛은 다 비슷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곤돌라 탑승에다 계획에 없던 수상택시까지 더해지면서 비용이 부담스러워서 저러나 생각되기도 하고 같은 말을 들어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상황이 씁쓸했다. 사실 시간도 부족했다. 아이들은 커피로 설왕설래 중인 엄마. 아빠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일단 아이들이 정해 놓은 곳이 있다니 거기부터 가자.”     

 우리는 구글맵을 보며 ‘수소 젤라토’라는 가게를 찾아갔다. 그곳은 웨이팅이 길었다. 아이들은 줄을 서서 원하는 젤라토를 사고 나는 가게 안을 구경했다. 스무 가지가 넘는 다양한 젤라토들이 먹음직스럽게 보였고 콘에 담아주는 모양도 예뻤다. 남편과 아이들은 만족해하며 운하를 배경으로 다리 위에서 젤라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예쁘게 찍혔는데 그 맛은 심하게 달았다. 한낮 베네치아의 골목은 뜨겁고, 젤라토는 녹아내려 끈적였다. 남편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젤라토 맛에 실망하며 내 눈치를 봤다. 나에게 젤라토 대신 커피를 사줘야 하나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그 마음이 읽혀서 조금 전 섭섭함이 다 풀렸다.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진심이다. 그가 나를 아끼고 있다는 진심만 전달되어도 우리는 이 상황을 유쾌하게 넘길 수 있다. 나는 그의 카라멜 맛 젤라토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장난을 쳤다. 


 “그래, 베네치아는 쓴 커피가 아니라 달고 단 기억으로 남겨야지. 겁나 달아요! 베네치아, 아주 달달 하네요”라고 깐족거리며 남편을 쫓아다녔다.     


 일행과 만나기로 약속한 산마르코 광장으로 돌아오자 시간이 조금 남았다. 남편은 혼자라도 얼른 플로리안에 가서 커피 마시고 오겠냐고 물었다. 혼자 마셔야 할 이유는 내게 없었다. 나는 괜찮다며 남편을 보고 웃었다. 에스프레소의 기억보다 더 오래 놀려먹을 달달한 베네치아의 기억을 얻었으니까. 그리고 남편과 이곳으로 다시 올 이유도 남겨야 하니까. 


 돌아가는 길은 'S'자 모양 대운하를 가로지르는 수상택시를 이용했고 가이드가 동행했다. 이어폰으로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베네치아의 멋진 풍광을 다시 한번 눈과 마음에 담았다. 우리가 걸었던 산마르코 광장의 높은 종탑, 둥근 회색 지붕의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화려한 호텔과 저택들. 리알토 다리, 쪽빛 대운하의 물살을 가르며 오가는 수상버스와 택시들.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람들. 자연과 인공이 마치 한 몸인 듯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니 누군가 ‘베네치아는 신과 인간의 합작품’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바다를 육지로 메우고 이토록 아름답고 정교한 도시를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짓고 유지하고 지켜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나 혼자 잘 살자고 할 수 있는 노동과 노력이 아니다. 지키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마음들이 모여 기적과도 같은 도시를 세웠을 것이다. 그 열정과 노력에 신은 은총을 더했으리라. 가족들의 얼굴을 보니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환하게 웃고 있다. 마침 가이드가 이태리 가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오 맑은 태양 너 참 아름답다 

폭풍우 지나고 너 더욱 찬란해

시원한 바람 솔솔 불어올 때 하늘에 밝은 해는 비치인다

나의 몸에는 사랑스런 오 나의 태양 비치인다

나의 나의 태양 찬란하게 비치인다    

 

  가이드가 이별의 선물로 불러준 ‘오 솔레미오’는 절정에서 기가 막힌 삑사리를 내며 우리에게 큰 웃음을 안겨 주었다. 아이들은 환상적인 베네치아와 유쾌했던 이 시간을 오래 기억할 거라고 말했다.    

 

 베네치아 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나는 언젠가 다시 산마르코 광장을 함께 걷고 종탑에 올라 노을이 깔린 베네치아의 풍경을 감상하며 카페 플로리안에서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때는 지중해의 빛나는 바다 한 번, 다정한 이의 얼굴 두 번 바라보며 여유롭게 커피 마셔야지. 나에게 수많은 처음을 선물해 주는 남편과 아이들이 곁에 있어 오늘도 나는 좋은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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