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도 그렇고, 왜 문화예술 분야는 유독 군기가 강할까요?”
“그래야 작품이 잘 나와.”
이젠 누구한테 들었던 대답인지도 기억이 흐릿하다. 분명한 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입에서 들었던 얘기라는 것일 뿐.
그렇다면 군대식 문화도 없고 선후배 간 위계도 약한 다른 나라들은 모두 문화 후진국인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저 답변의 옹호자들은 오랫동안 이 사회 문화예술계의 주류였다. 예능 계열 대학생들의 군대식 위계와 폭력이 여타 대학들보다 훨씬 심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3~4년 전, 한국에서 이제 갓 배우 생활을 시작한 재일교포와 이런저런 대화를 잠시 나눈 적이 있다.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엔 대학로에 있는 모 극단에 들어갔었다고 한다. 꽤 유명한 중견 배우가 운영하는 극단이다. 하지만 그는 몇 달 지나지 않아 그곳을 나왔다.
“한국의 선후배 문화를 안 겪어봐서 적응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냥 온종일 선배들이 후배들 군기만 잡아요. 연기라는 것은 배워보지 못했어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욕만 들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전 맞은 적은 없어요.”
그는 그 이후로 연극엔 관심이 없어졌고, 영화와 드라마 방면으로만 오디션을 보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 같이 활동했던 또 다른 배우는 우연히 지인을 통해 20대 연극인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20대 후반의 선배가 20대 중반의 후배를 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폭력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폭행당한 후배에게 “왜 맞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하냐?”고 물었더니,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선배님이 화를 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뭘 잘못했는지, 왜 맞았는지도 모르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다고 전했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십수 년간 형성된 서열 문화의 잔재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언(?)을 이런 식으로 종종 접한다.
심지어 연극 포스터를 제작할 때, 출연 배우들의 이름을 분량이나 비중과 관계없이 ‘서열 순(짬밥 순)’으로 표기하는 행태도 여전히 존재한다. 관객은 어느 배우가 선배이고 누가 후배인지 관심 없다. 관객보다 자신들의 위계를 더 귀중하게 여긴다는 증빙이다. 이 후진적 행태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현시대에도 행해지고 있다. 어차피 관객의 대다수도 연극 관계자들이니 서열 순으로 이름을 표기해 위계를 과시하려는 의도일까?
연극판의 위기는 이런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 시대가 변해서? 관객이 변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연극을 만드는 이들이 이런 구시대적인 행태를 방관했기 때문이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서열 문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관객들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