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 젠더|스웨덴 유아교육은 '편견 깨기'에서 시작한다
쌀쌀하다. 9월 중순의 날씨가 이렇게까지 춥다니. 믿기지 않는다. ‘히트텍을 한국에서 가져왔어야 했어..’ 후회가 몰려오는 순간, 활기차게 모래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한두명이 아니다. 옷을 잘 껴입은 아이들은 춥다고 생각지도 않는 듯, 모래 놀이에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나쁜 옷만 있을 뿐이다’라는 속담이 있는 나라. 우리는 지금 스웨덴에 와있다.
스웨덴의 유치원은 한국과 여러모로 다르다. 일단 ‘유치원’이라고 쓰인 커다란 간판이 없다. 스웨덴어를 잘 모른다면, ‘이곳은 유치원입니다’라고 누군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 여기가 뭐 하는 덴지 알 길이 없다. 내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문화의 나라답다. 소박한 건물의 내부로 들어가면, 1살부터 5살까지 귀여운 아이들이 잔뜩 앉아있는 걸 볼 수 있다. (스웨덴 법률은 부모 동의 없는 미취학 아동의 얼굴 노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귀여움을 여러분과 공유할 길은 없다.)
아이들과 손 인사를 하며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얘는 여자애인가? 남자애인가?’라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보라색 바지에 반짝반짝 스팽글이 달린 흰 티를 입은 매우 귀여운 아이가 있었는데 외형만 봐서는 성별 구분이 힘들다.
[이갈리아 유치원의 원장 로따 라얄린]
“우리는 ‘여자아이’, ‘남자아이’라는 단어 자체를 쓰지 않는다. 이곳에는 그냥 ‘아이’와 ‘어른’이 있을 뿐이다.” ‘성중립 유치원’(Gender Neutral Preschool)으로 잘 알려진 이갈리아 유치원의 원장 로따 라얄린의 말이다.
“왜 ‘남자아이’, ‘여자아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가요?”
“이 아이가 ‘남자’라고, ‘여자’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아이의 무한한 가능성을 한계짓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남자와 여자는 다르지 않나요?”
“저희는 생물학적인 차이를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아이들이 성별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중요시 여길 뿐입니다.”
″취지는 알겠는데, 아직 아이들이 너무 어리지 않나요?”
″아이가 태어난 후의 첫 6~7년은 무언가를 제일 잘 배울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잠시 뒤, 원장 로따가 오히려 우리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이를 남자와 여자로 꼭 나눠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남자와 여자로 나뉜 세상‘은 태어난 직후부터 우리가 수십년 넘게 봐온 모습이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성별에 따라 다른 색깔의 옷이 입혀지고, 울음소리도 다르게 해석된다. 보호자, 교육기관, 미디어 등 온갖 통로를 통해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르다’는 메시지를 계속 주입받는다.
몸가짐과 차림새도 달라야 하고, ‘남자가 할 일‘과 ‘여자가 할 일‘이 따로 있음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학습하며 우리는 살아왔다. 지극히 당연한 것 앞에서 ‘그런데 왜 그래야 하지?’라는 의문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이갈리아 원장 로따가 아동들이 춤출 때 입는 치마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빨강, 핑크 등 화려한 색감의 치마는 이곳의 아동들에게 '여자애나 입는 것'이 아닌 '춤출 때 입고 싶은 예쁜 옷'이었다.]
[성기가 사실적으로 표현된 인형]
그러나 스웨덴의 유치원에서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성별 구분이 금지된다. 스웨덴의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하는 법에 따르면, 교육학적 목표 없이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나눠 그룹을 만드는 것은 ‘차별 행위’에 속하며 문제가 될 수 있다. 교사가 아이들을 소그룹으로 나눌 때는 교육 전문가의 방침을 따라야 한다.
‘남자아이는 파란색, 여자아이는 핑크색’ 과 같은 표현이나 행위도 일절 안 된다. 한국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것들이 스웨덴에서는 ‘차별’에 해당한다니, 다소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탈렌 유치원의 원장 안느 샬로떼 카를손]
공립 유치원인 크리스탈렌 유치원의 원장 안느 샬로떼 카를손은 ”아이들이 성별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아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유튜브나 TV를 보고 ‘남자다운 것‘, ‘여자다운 것‘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유치원은 어떻게 할까. 원장 안느는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는다”며 ”‘너는 잘못했다’면서 혼내기보다는 질문함으로써 아이 스스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고 말했다.
크리스탈렌 교사 미미 아돌프손은 "나도 모르게 남자 애들에게 이야기할 시간을 더 많이 주고, 여자애들에게는 좀 더 높은 목소리로 말할 때가 있다"며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이 문제"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스웨덴은 정부 차원에서 “유치원에서부터 성평등 교육을 아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었다. 스웨덴 유치원은 1998년 ‘유치원의 교육과정’에 관한 정부 정책이 발표되면서, 이전까지 단순한 탁아소 기능을 했던 데서 ‘교육기관’으로 정체성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유치원은 학교법에 따라 운영되고 있었고, “놀이 교재부터 다양한 활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성평등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는 정부 정책을 따르게 됐다.
크리스탈렌 유치원 원장 안느는 빨간색 사물함에 대해 "아주 예전에는 '빨간색은 여자의 색'이라고 싫어하는 남자애들이 있었다"며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말을 하는 남자애가 단 한명도 없다"고 말했다.
[싱크대 앞에서 일하는 사람은 특정 성별만이 아니다. 이를 알려주기 위해 여성, 남성 대신 해골을 등장시켰다.]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들. 남자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고, 여자 주인공은 왕자를 기다리고 등등 전형적인 편견을 담은 동화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은 어른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 요구 및 희망 사항 등에 따라 무엇이 여성스럽고 남성스러운 것인지 깨닫는다. 유치원에서는 전통적인 양성 역할이나 패턴에서 탈피해야 한다.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 모두 같은 가능성을 가지고 능력과 흥미를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스웨덴 유치원의 교육 과정에 담긴 내용이다. 성평등 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각 유치원은 정부에 관련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며 정부의 감독도 받는다.
'말괄량이 삐삐' 작가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등 여성 작가들의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다. 이갈리아 원장 로따는 "몇천년 동안 액자에는 남자들만 걸려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들을 액자에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1998년 정부 발표 이전만 해도 카페'는 유치원 여아들이 주로 놀던 공간이었으나 정부가 적극적으로 성평등 교육을 주문하면서 '모두 함께 노는 곳'으로 변화했다.]
[이곳은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는 아이들이 식사하는 공간이다. 유치원은 개개인의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허프포스트는 유치원을 방문한 다음 날 성평등 장관 오사 린드하겐을 만나 이러한 교육 정책의 이유를 물었다. 그는 “한 개인으로서 우리는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성별 때문에 제한받아선 절대 안 된다”며 개개인이 ‘자신만의 최고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게 사회의 책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성평등 장관 인터뷰 기사 보러 가기)
우리가 방문한 스웨덴의 유치원들에서는 눈길을 잡아끄는 게 또 하나 있었다. 아이들이 ‘감정을 잘 다루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 6개 인형은 각각 ‘기쁨’,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을 의미한다. 아직 말을 잘 못 하고, 말을 좀 하더라도 표현을 어려워하는 아이들은 인형을 통해 감정 표현을 배우고 있었다. 예를 들어, 긴장되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아직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과 유사한 표정을 가진 인형을 집어 듦으로써 교사에게 감정 상태를 알린다.
[기쁨, 슬픔, 분노 등등 다양한 감정을 의미하는 인형들. 살다 보면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보여준다.]
슬프고 화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교사는 ‘위로’의 인형을 등장 시켜 슬프고 화난 인형을 토닥거리는 걸 보여준다.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갑자기 폭발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은 걸 감안한다면, 스웨덴 유치원은 어릴 때부터 인생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무서워" "안심해" 등등 다양한 감정 상태를 보여주는 그림]
“스웨덴에서는 스트레스로 내면이 완전히 무너지는 상황을 ‘벽에 들어간다’는 말로 표현한다. 다른 사람이 벽에 들어갔을 때, 혹은 스스로가 벽에 들어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이를, 혹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미리 배워두면 벽에서 좀 더 빨리 나올 수 있지 않겠나. 안정적으로 지내는 법을 배우는 건 매우 중요하다.”(이갈리아 유치원 원장 로따)
... [중략] ...
SUJEAN PARK/HUFFPOST KOREA
“남자애는 힘이 세야 해” “여자애치고 제법인데”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와 ‘너는 한 개인으로서 모든 걸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는 장래에 어떤 차이를 보일까? 한국에 사는 우리는 전통과 문화라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무한대가 아닌 ‘2개의 길’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웨덴 유치원은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에 대해 커다란 물음표를 던지고, 새로운 길을 가고 있었다.
... [후략]
*위 기사는 요약본으로, 스웨덴의 성평등 유아교육과 정책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보실 수 있습니다.
진행: 박수진, 윤인경 에디터
글: 곽상아 에디터
영상: 이윤섭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