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교회 분투기 19] 조금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찾고 있는 청년들에게(feat. 바오밥 나무)
#1 거짓말 같은 순간으로 기억되는, 감히 내 인생 가장 벅찬 감격으로 점철된 장면 중 한때는 아프리카 여행입니다. 어떻게 해도 다 표현할 수 없는 환상적인 은혜가 있었기에, 스물아홉의 나는 자전거로 아프리카의 대지를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을 만나는 광야’를 가슴에 품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상황 속에서 함께 하심’(열정, God in)을 믿는다는 것은, 당시엔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2 20대의 청춘 그리고 30대의 젊은이들…. 저마다 내 앞에 놓인 상황은 다르지만 기대치는 높고, 고립감이 유일한 친구처럼 느껴지는 시기를 겪었을 겁니다. 밀어내기 힘든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고 싶고, 무력함과 낙심을 애써 지워보려 하루를 온갖 것들로 가득 채워도 봤을 겁니다. 하지만 세상의 소음이 사라지고 나면 텅 빈 외로움이 더 크게 마음을 후벼 파곤 했던 날들, 저도 그랬었습니다. 29세에서 30세로 넘어가던 에티오피아 어느 마을에서의 12월 31일의 깊은 밤, 적요함이 온몸을 휘감던 그때의 나는 기댈 곳이 하나님밖에는 없었습니다.
#3 오랜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어디선가 문득, 귓전을 때리는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너무 지쳤어요…” 그 한마디가 그때는 왜 그리 무겁게 느껴졌던 걸까요? 시간이 흐르고, 목회자가 된 지금, 그때의 내 나이 청년들을 보고 있자니 오늘도 그리 행복하지 않은 바쁜 일상 속에서 자존심 다 내려두고 쫓기듯 살아가며, 정서적 고립과 탈진에 눌려 신음하는 영혼들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은 어디서 안식을 찾는 걸까, 어디선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안온한 쉼으로 함께하는 공동체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4 어쩌면 안식과 위로를 찾으려 교회를 방문했다가 어긋난 기대 속에 마음의 문을 닫았던 경험이 한 번쯤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치여 혼자라고 느끼던 시린 마음으로 차가운 세상에서 따뜻함을 찾아 들어갔던 곳이지만, 그곳에서도 상처를 받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그 문은 더욱 무겁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했던 순간에 그만 거리를 두었을지도 모릅니다.
#5 다시 아프리카 돌아가서, 바오밥나무를 봤던 것은 말라위호수의 작은 섬 ‘치주물루’에서였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신비한 모습의 바오밥 나무는 일견 크고 강인하지만, 그 거대한 나무도 처음에는 작은 씨앗에서 시작했습니다. 흔한 클리셰 같은 표현이지만 우리의 믿음도 그러합니다. 작고 여린 씨앗에서 자라나 때론 폭풍에 맞서기도 하고, 가뭄 속에서 힘겹게 견뎌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바오밥 나무가 깊이 뿌리를 내리며 황량한 땅에서 수천 년을 버티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 또한 그렇게 뿌리내릴 때, 거칠고 고단한 세상 속에서 버틸 수 있습니다.
#6 주 안에서 격려하고픈 청년들이여, 당신이 서 있는 자리는 아프리카 대지처럼 건조하고 메마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교회가 (예배든, 공동체의 교제든) 바람에 날아가는 모래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오히려 당신을 지치고, 아프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서 있는 자리, 그 메마른 땅도 언젠가는 비를 맞고, 다시 생명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섭리니까요.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18)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까요.
#7 아프리카의 평화로운 일상이 그려지나요? 한낮 더위를 피해 마을 사람들은 바오밥 나무 아래로 모여듭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지혜를 나누며, 삶의 길을 찾습니다. 석양이 질 무렵에는 어느샌가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이들이 모여 그들만의 시끌벅적한 놀이터가 됩니다. 바오밥나무 아래서는 누구나 홀로 됨 없이 모두가 환영받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그러합니다.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교회는 지치고, 외롭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바오밥 나무 같은 곳이어야 합니다. 그 나무 아래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를 품고, 사랑하며, 기도하는 곳이 교회의 본래 기능 중 하나입니다.
#8 아프리카 사람들이 바오밥나무 아래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삶의 지혜를 찾듯이,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 공간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삶을 나누고, 꿈을 꾸며, 회복할 수 있는 관계의 공간입니다. 교회는 단순한 건물이 아닌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며 그 고백대로 살아가기를 분투하는 곳입니다. 공동체의 본래 뜻대로 서로가 서로를 위해 선물이 되고, 위로가 되는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진정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임을 믿습니다.
#9 바오밥 나무 아래서, 저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인 저에게도 적의 없는 미소를 보냈고,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때마다 길을 잃지 않도록, 혼자라 느끼지 않도록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이곳에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할 제법 안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곳에서 다시 회복을 찾고, 실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역설적으로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머리 되시는 교회 말입니다.
#10 네, 극 F여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조금 센티해진 마음으로 두서없이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아프리카 마을의 이정표와도 같은 바오밥 나무 아래서 서로를 기다리듯이, 우리 바꾸는교회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개척의 마음으로 다시 세워지고 있기에 서툽니다. 화려한 예배와 풍성한 사역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마저 당신을 외면하지는 않을 겁니다. 교회가 신앙의 양심을 팔지는 않을 겁니다. 말씀 앞에 서기 위해 애를 쓸 것이고, 여러 물리적 한계와 경험의 부족함을 겸손과 열정의 땔감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는 말씀에는 진심일 것입니다.
지나다 들르셔도 됩니다. 예배 후 애찬 한번 하고 가세요. 등록에 대한 권유나 부담은 전혀 없습니다. 모르죠,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교회가 언젠가는 아프리카로 비전트립을 떠날 지도요. 일단 저는 주님을 신뢰하며, 꿈을 꿉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아니더라도 주님의 은총 가운데 당신이 좋은 공동체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쌀쌀해진 날씨, 건강 잘 챙기세요. 주 안에서 격하게 축복합니다.